인생은 참여자(參與者)의 것이지 방관자(傍觀者)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뒷산으로 가벼운 산책을 가던, 남극으로 탐험여행을 떠나던 간에 아무튼 나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인생이라는 이름의 무대(舞臺)에는 결코 방관자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방관자를 거론하려니, 불교역사에서 제2의 붓다로 받들 정도로 위대한 스승이신 용수(龍樹)보살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희론(戱論), 즉 말장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마치 쇼윈도에 내건 전시품인양 이리저리 쳐다보며, 갖가지의 해석을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그럼 말장난은 어떤 유형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용수보살은 크게 두 가지 태도로 나누어 경계하십니다.
 희론의 첫 번째는 애론(愛論)입니다. 말 그대로 애착하는 논리에 빠져듭니다. 다시 얘기하자면 자신이 목격하는 존재나 현상에 대한 집착을 가리킵니다. 정적(情的)인 대상들, 이른바 정붙인 고향이나 가족이나 직장 또는 가구나 그림이나 음악 등에 대해서 철저히 자기 위주로만 고정시키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견론(見論)으로, 자신이 본 견해만을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흔히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많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세상이나 사람을 단칼로 베듯이 간단히 도식화(圖式化)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는 신념을 지킨다는 구실로….


 제멋대로의 도리(道理)가 난무(亂舞)하는 세상입니다. 집안의 도리가 있고, 가정의 도리가 있고, 사회의 도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는 자기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자기식의 도리를 설정해 버리고나면, 그 도리를 위해서 남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낌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좌익(左翼)과 우익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프랑스혁명 당시 아닙니까? 어느 쪽에 줄을 섰느냐에 따라서 당파(黨派)가 결정 지워졌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만히 따져봅시다. 어떤 견해에 집착을 합니다. 집착을 하게 되면 틀 속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논리를 개발하고 주장하기에 여념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어떤 짓이고 하게 됩니다.
 이런 경향은 개개인의 사안(事案)으로 그치질 않습니다. 어떤 유행(流行)이 불어 닥치면, 이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건은 금방 사이비(似而非)로 취급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들은 피해자(被害者)임과 동시에 가해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유행에 동조하는가 아니면 뒤처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즉 공업(共業)의 당사자들끼리 만나고 있음보다 앞서는 진실은 없습니다.
 때문에 애론(愛論)의 허구성은 지적하고 말고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신이 목격하는 존재나 현상에 대한 집착은 결코 자신의 존재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익숙한 사람이나 사물이 항상 하기를 바랍니다만, 아무리 익숙한 것도 보십시오. 익숙하셨던 할아버지나, 익숙하셨던 어머니가 여러분 곁에 항상 계십니까? 계실 리 없습니다. 100% 그렇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니까 내 옆에 있어야 되는 거지, 할아버지의 입장이 아닙니다. 나의 어머니니까 오래 사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애론이 갖는 한계입니다.
 또한 견론(見論)도 다르지 않습니다. 열 몇 살 때 선택한 고등학교를 가지고 예순이나 일흔이 되서도 줄을 서는 세태는 정녕 건강한 정신 상태가 아닐 것입니다. 참 갑갑한 얘기입니다. 제가 법우님들과 면담할 때 여러분의 출신(出身)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습니까? 전공도 안 묻습니다. 대화중에 다른 얘기에 얹혀서 언급될 수는 있어도, 일부러 묻지는 않습니다. 10년 이상 같이 정진하고 있어도 그 법우의 직업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성(天性)이 게으르기도 하겠지만, 전혀 묻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과거에 누구였는지는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 누구로 만나고 있는가 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자신이 본 견해만을 집착하려는 태도는, 모든 만남을 원천적으로 봉쇄(封鎖)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해서 견론의 말장난은 고려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장난은, 단순히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닙니다. 애론과 견론을 앞세우며, 열심히 침을 튀기며 사는 사람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고정된 나[我]가 있어서, 고정된 현실을 살아간다는 근본적인 착각에 말미암으면서….


하지만 세상을 사는 자, 누구든 잡고 물어봅시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처지마다 다른 표현의 답이 나오겠지만, 그 모두를 뭉뚱그린다면 ‘자기 삶의 참여자(參與者), 더 나아가서 주인(主人)으로 살고 싶다’는 내용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알고서 그것을 마음대로 쓰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권력(權力)·재력(財力)·무력(武力)·완력(腕力) 등등 갖가지의 힘이 있겠지만, 그 어떤 힘보다 강력하며 세상의 모든 힘들을 쥐락펴락하는 진정한 힘은 바로 변화(變化)가 아닐까? 불가(佛家)의 말로 <무상(無常)의 법칙> 말입니다.
세상에 얼굴을 내민 모든 존재는,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 변화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을 받아들이며, 지레 인생의 허망(虛妄)함에 한숨을 내쉬지는 맙시다. 변화 그 자체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맞이하고 있는 어떤 상황의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판단(價値判斷)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참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변해가는 가운데서 내가 가치부여를 하니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위대해보이거나 또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이거나 간에,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상 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따라서 온갖 것이 변화해간다는 무상의 법칙으로 해서, 오히려 마음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움켜잡는 것에 우린 참 익숙한데, 온갖 것이 변화해간다는 것은 나쁜 것도 변화해감을 뜻합니다. 자신을 그만 좀 들볶고 여유 좀 주자 이겁니다.
 “좋은 것만 잡으려는 게 아니고, 나쁜 것도 잡고 있구나.”
 “좋은 것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나쁜 것도 흘러가고 있구나.”
 이런 식으로 삶을 전면적(全面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분명히 사라집니다. 세월의 흐름 따라, 생각의 변천 따라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는 허무(虛無)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무기력한 방관자의 태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참여자로서의 삶이 새로운 활력과 희망과 또 그 안에 새로운 빛을 보게 됨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익숙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슨 활력(活力)이 나오겠습니까? 고정된 것을 좋아하며, ‘나는 죽겠습니다’ 하면서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새가 없습니다. 변화하고 있음을 즐길 줄 알아야겠습니다. 변화로부터 활력이 나오고 희망의 싹이 돋기에 말입니다.




법우~^^P1450972.JPG






g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