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그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비난이나 대우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딴에는 열심히 그리고 옳게 살아보겠다고 했지만, 그에 상응한 반응이 없을 때는 무척이나 서운할 것입니다. 참다가 너무 억울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저는 얼마나 잘났다고?’ 하면서 밤새 욕을 해대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술로 쓰린 가슴을 달래며,
“그래. 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식의 아쉬운 푸념을 늘어놓지는 않았나요?
아무튼 당사자가 동의(同意)한 바도 없고, 동의할 수 없다고 제아무리 주장해도 소용없습니다.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가당치도 않은 부당한 평가를 받으니 좋은 기분일 턱이 없습니다.

그럼 과연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요?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람을 보는 기준(基準)이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람을 놓고서 잘못 보았다거나 새롭게 본다는 말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시간이나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춤추는 평가의 잣대는 믿을 바가 못 됩니다.
이는 곧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척에까지 사람이 다가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딘가 다른 광경에 눈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면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가하면 머릿속이 어떤 걱정이나 근심 또는 기쁨이나 즐거움 등으로 한껏 채워져 있을 때는, 옆 사람의 하는 말이 들리지 않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보고 있되 보지 못하고 듣고 있되 듣지 못함으로써, 많은 경우 칭찬보다는 남들을 비난하거나 또는 남들로부터 비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장보살은 17번째 원(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의 참생명은 부처님생명이니,
 제가 부처님생명으로 사는 시방(十方)세계에서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들이
 저의 참생명 이름을 칭찬(稱讚)할 것입니다.

법우님은 시방세계에서 오신 모든 부처님들이 참생명 이름을 칭찬한다는 말씀이 실감납니까? 아니라면 스스로 부처님들의 칭찬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가난한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선은 모든 부처님들의 칭찬이 실감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먼저 자신의 참생명 자리로부터 칭찬하고 볼 일입니다. 복(福)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슬픈 곡조로 한탄할 때가 아닙니다. 남의 가락에 춤추고 남의 노래를 흉내 내는 동안, 나의 가락은 없어지고 나의 노래는 잊혀집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려고 한다면, 줏대도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꼭두각시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누군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보다는,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적어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바깥의 어떤 반응도 자기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웃는 낯으로 다가와, 부드러운 말로 칭찬할 때는 언제쯤일까?”
하면서 목을 빼고 기다릴 새가 없습니다. 자신의 반응이 먼저입니다. 먼저 웃어주고,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면 그만이기에 말입니다.

시방세계에서 오신 모든 부처님들이 우리들의 참생명 이름을 칭찬하는 이유는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를 부처님으로 칭찬하기에, 만나는 모든 인연들을 부처님으로 칭찬할 따름입니다.
이를 뒤집어 얘기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자신이 칭찬받고 싶다면, 먼저 다른 사람이 칭찬받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와의 인연이라는 연장선상에서의 다른 사람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인연법에 의해서 나도 덩달아 칭찬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구경 갔을 때를 떠올려 봅시다. 영화구경을 가는 많은 사람들은 사전에 영화평론가와 같은 남들의 평가를 먼저 듣고 갑니다. 그렇게 미리부터 선입견(先入見)을 갖고 영화를 감상(鑑賞)하다보면 자신을 비평가로 자리매김하려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흠부터 잡으려고 합니다.
감상한다는 것은 영화의 세계에 동화(同化)됨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좀체 영화를 감상하지 못합니다. 배우의 연기나 조명 등 부분적인 요소를 분석(分析)하기에 여념 없습니다. 마침내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휴! 그 배우는 역시 안 돼’ 하면서도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려고나 해봤습니까? 재미있으려고 노력해봤나요? 영화가 재미없다고 하는데 어느 특정한 영화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불평하기에 앞서서, 영화에서 재미를 느끼려고 자신을 참으로 담근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다른 사람이 싫어하면, ‘아니, 이 좋은 걸 왜 안 해?’ 하면서 서슴없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입니다. 그 사람은 미처 재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고, 자기는 발견한 재미에 푹 빠져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이와 같이 칭찬을 발견하는 만큼, 걸맞은 칭찬으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무조건 먼저 칭찬하고 볼 일입니다. 물론 스스로의 생명가치를 칭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한정된 자신의 기준 즉 중생적인 기준으로부터 비롯된 칭찬이기에, 상대를 중생으로 대하려는 강요(强要)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을 칭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칭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는 생명선언을 통하여, 먼저 스스로를 칭찬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입니다.
또한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 하는 생명선언에서 비롯되어, 부모를 칭찬하고 자식을 칭찬합니다.
주변이 밝아지면, 나의 삶은 당연히 밝아집니다. 따라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잘났으면, 그 한가운데 자리하는 내가 가장 큰 혜택을 받지 않겠습니까?
칭찬받는다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참으로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들이 지금도 우리의 참생명을 찬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고정시킨 채로 꽉 움켜쥐고서는, 그 찬탄 받을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주먹을 꽉 쥐고서 깨끗한 약수(藥水)를 받아 마실 방법은 없습니다.
시냇물을 떠먹으려면 손을 벌리고 떠먹어야 됩니다. 그때 상쾌한 물이 내 목젖을 적십니다. 손을 펴세요. 펴서 시냇물을 받아 마시세요. 얼마든지 떠서 먹을 수 있어요. 두 손을 활짝 펴는 겁니다. 활짝 폈을 때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무엇이고 쥘 수 있게 됩니다. 온통 칭찬의 가락에 춤을 추고, 칭찬의 노래 부를 삶의 모든 것들을….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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