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없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는다는 겁니다. 무슨 마음을 먹었느냐가 라는 것이죠.
그럼 ‘어떤 마음을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여래십호(如來十號)-부처님을 이르는 열 가지의 이름-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여래는 ‘응공(應供)’이시다, ‘마땅히 공양 받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마땅히 공양 받으실만한 분을 가리켜 부처님이라고 부른다는 거죠. 어떠한 공양도 받으시는 분이고, 그 받으시는 공양으로 당신 생명의 무한성을 증명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양 하면 보통 음식을 떠올리지만, 내가 공양 받은 것이 나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흔히들 복이 많다 적다를 얘기하는데, 복을 무한히 받아서 자기 것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복 많은 사람이고, 아무리 복을 줘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 내안에서 어떤 마음을 받아들여서 사느냐가 자기 인생입니다.


안다는 것은 아는 대로 사는 것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과 아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안다는 것은 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아는 그대로 행동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실천할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법우님들께 정진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진은 해야 하는 것, 정진은 좋은 것이라는 논리적인 동의가 정진은 아닙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들어가지 않으면 정진이 아닙니다. 꼭 108배를 해야 된다거나 3천배를 해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걸으면서, 일하면서, 밥 먹으면서, 대화하면서, 잠자면서 어느 순간에도 신구의 삼업이 다 들어가지 않는 정진은 정진이 아닌 겁니다.
정진은 좋은 거라고 동의만 하고, 정진에 대한 법문을 듣기만 하면 뭐할 겁니까? 남들이 맛있게 먹은 얘기를 듣고,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외운다 한들 내 배가 부릅니까?

지금 분명한 것은 삶은 쳐다보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감의 단위라는 겁니다. 물을 아무리 쳐다보고 상상해봐야, 내가 건너가는 건 아닙니다.
그냥 건너가는 겁니다. 헤엄치는 겁니다. 그것이 인생살이거든요.
알고 보면 우리는 그 능력을 다 갖고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이미 다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부처로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는 부처님의 무한능력자라는 얘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삼세(三世)의 주인공이고 삼천대천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자리, 나의 참생명 자리를 아느냐는 물음, 부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는 부처냐고 물으시는 것에 우리는 답해야죠.
부처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부처로 살아갈 때를 정진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정진한다는 말을 보세요. 생명의 엑기스를 모아서 나아가는 것이 정진인 겁니다.
엑기스를 모으지 않고 “아! 어디어디가 정진하기 좋다더라” “어떤 사람이 정진하는데 대단하대” “그 사람 법문 한번 들어볼까?”하는 식의 자세는, 자기 털끝 하나도 건드려본 적이 없는 구경꾼의 자세입니다.
정진한다는 것은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나, 온갖 배역으로 있는 나, 그 나가 죽을 사이가 없다는 거예요. 정진하고 있는 사람은 죽을 새도 없습니다.
참생명에 무슨 죽음이 있습니까? 참생명의 반영이 몸뚱이요, 사업이요, 만나는 인간관계입니다. 내 스크린에 나타난 것을 보지 말고 내 근원자리에 무엇을 찍을 것이며, 그 근원자리에서 무엇을 행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원인 자리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무한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원인 자리에 우리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몸뚱이나 어떤 측정된 현상에 감사하려니까, 나한테 무엇을 해주었는가에 촉각을 세우고는 “나한테 관심이나 있냐?”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라고 따지기 바쁘죠.
우린 이미 무한히 받았습니다. 무한히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쓰지 않고 팽개치고는 다른 것을 찾으려 하니 항상 괴로울 수밖에요. 나를 앞세우는 한 100% 괴롭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어느 상태에 있든 나를 앞세우면 이미 괴로움의 시작일 뿐입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진정 나인가? 아니죠. 현상일 뿐입니다.


역경은 생명을 수정할 기회
지나간 삶을 돌아보니 무한히 공급받은 것을 모른 척했고, 그 공급받은 내용이 엄청난 능력의 자리였음을 알게 됩니다. 알고 나니 이제 해야 될 것은 오직 참회와 감사밖에 없습니다.

참회합니다.
지나간 삶을 돌아보니 달마대사 말씀처럼 근본은 버리고 사소한 일을 쫓으며 생사의 물결 속을 윤회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저지르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잠재했던 것이 나에게 나타났구나.’ 온통 참회합니다, 예요. 그것이 병이 되었든, 재산의 손실이 되었든, 인간관계의 파멸이 되었든 간에 내 앞에 등장했다면 참회할 뿐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의 능력이 부처님생명의 능력이랍니다. 무한능력이랍니다. 그러니 참회합니다와 동시에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자기에 대한 무한신뢰, 자기 참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 여기서부터 진정으로 살게 되는 것이죠.

오늘의 나, 오늘 하고 있는 일, 이것은 온통 살려짐의 결과인 겁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나라는 자에게 온통 도움이 될 뿐이지 나에게 해 되는 것은 나의 눈에 띄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설사 지금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내 생명을 수정하라고 하는 기회이지, 내 생명을 갉아먹고 내 생명이 어두워지라고 하는 역경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부처님생명일 수밖에 없으니 내가 하는 일은 부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럼 부처님이 부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온통 누릴 것밖에 없겠지요.

왜 그럴까? 나는 부처님의 무한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때 비로소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때 나는 현상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부처님생명으로서 이미 살려짐에 맡긴 나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현상에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응공이라 그랬습니다. “마땅히 공양 받을 만하다!”고 먼저 선언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느냐?
우리의 마음이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조금만 칭찬의 소리를 하면 헤헤거렸다가, 조금만 나쁜 소리 하면 마음이 가라앉는데 이 변화무쌍한 마음을 어떻게 믿습니까?

부처님의 무한생명, 무한광명에서 마음을 잡수세요. 어떤 마음이라도 잡수세요. 마음먹기 달린 거 맞습니다. 언뜻 보면 현상적인 입장에서는 마음먹기 달린 게 아닙니다만, 부처님생명인 무한능력자로서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는 마음자리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거리낄 게 없다는 겁니다.
결국 부처님생명으로 살아가면 거기에 나의 길이 열립니다. 나의 길이 열리면, 가면 되는 겁니다. 가면 길이요, 길이 있으면 가는 겁니다.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지금 무슨 마음을 잡수시는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주십시오.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을 먹고 있을까? 과거의 마음일까? 미래의 마음일까? 현재의 마음일까? 오직 부처님생명으로서의 마음입니다. 무한능력자로서의 마음, 무한생명 무한광명으로서의 나의 기회, 이것만을 여러분들이 잡수십시오.
매일매일 잡수시는 여러분들은 그 무한으로서 무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여러분이 사는 과정은 무한한 광명이 빛날 것이며, 하시는 사업은 무한히 그 빛을 또 많은 분들에게 회향을 할 것이며, 여러분의 몸은 항상 무한한 능력으로서의 삶을 드러낼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지겠습니다.
지금 무슨 마음을 잡수십니까?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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