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大乘)이란 무엇인가?

조회 수 8236 추천 수 0 2014.02.17 15:45:01

대승(大乘)이란 무엇인가?

 

한국불교를 일컬을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대승불교’라는 말이 언급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국ㆍ중국ㆍ일본의 불교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이고, 스리랑카ㆍ태국 등 동남아의 불교는 소승불교(小乘佛敎)라는 도식적인 구분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대승ㆍ소승의 개념은 우리가 진정한 불법(佛法)을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이에 관하여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불교사(佛敎史)에서 봤을 때 일종의 필연성(必然性)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교계는 관념화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현하고 전파하기보다는 이론적으로 추구하다보니, 불교는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이 되고 점차 대중성이 미약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당연히 불교의 침체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우려한 사람들이 석가모니부처님 시대의 활발한 모습으로 복귀하자는 운동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를 이론의 틀에 가둔다는 것은 단지 자기만족일 뿐이기에 이러한 기존의 보수적인 불교를 소승(小乘)이라고 칭하며 강하게 거부하고, 자기들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대승불교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소승의 무리들을 가리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으로 불렀습니다.

성문(聲聞)이란 본래 석가모니부처님의 음성[聲]을 직접 들은[聞]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들 중에는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지나쳐서 권위주의와 차별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갖는 특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 절대성을 부여하여 유일한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문(聲聞)이라는 말 그대로 소리[聲]를 듣기만[聞] 하는 자들로서, 책을 읽거나 강설을 듣고 자신의 지식욕이 채워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이 성문의 유일한 보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문은 지식을 구하는 노력에 있어서는 참으로 열심이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지식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기에 성문은 지식을 소유하는가 하면, 지식에 스스로 소유당하고 맙니다.

 

또 다른 소승의 무리인 연각(緣覺)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승도 없이 스스로 혼자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서 독각(獨覺) 또는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연각은 스스로 깨달았다는 감각을 만끽하기만 할 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지도 않고, 오직 혼자만의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 부류입니다. 따라서 연각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강하게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하며 새로운 체험의 가능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문이나 연각과 같은 소승적인 사람들이 나름대로 충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성실하고 철저하게 추구해 가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삶의 태도는 분명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문이나 연각의 목표는 자신의 학문적인 성취나 혼자만의 깨달음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다른 많은 생명에 대한 배려는 항상 뒷전에 두게 되고,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을 모순으로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생명과의 단절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대승(大乘)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러한 성문과 연각의 삶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들은 ‘매순간 참생명을 구현해가며 살아가는 구도자’를 뜻하는 보살(菩薩)을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삶으로 추구합니다.

보살에게는 나와 너라는 구별이 애당초 없습니다. 남이 원래 없기에 세상사 모두가 나의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자아(自我)가 자신에게 없듯이, 세상의 모든 것에도 실체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무한한 생명의 교류 속에서 진정한 동체자비(同體慈悲)를 실현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살이 획일적인 한 가지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도 삶의 주인공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러한 보살에게는 참되게 산다는 것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에 억지로 도달하려는 작위적인 태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비유하여, 성문과 연각이 자신이 토한 실로 스스로를 묶는 누에와 같다면, 보살은 자신이 토한 실 위를 자유자재로 노니는 거미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삶의 과정 자체가 이미 완성임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승’이란 단지 과거 한때에 인도에 있었던 성문이나 독각으로 불리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의 교류 속에 한시도 멈춤 없이 무한히 살려짐으로써 누리게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외면하고 경직된 삶을 살아가는 삶의 양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대승’이란 과거에 한때 인도에서 벌어졌던 불교운동이라는 일회적(一回的) 사건일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 매순간마다 무분별의 지혜로 삶의 모습을 고정시키지 않고 어디에서도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이르는 말이 바로 대승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정리 : 범정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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