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菩薩)로 살아간다

조회 수 5782 추천 수 0 2014.08.09 03:48:22

보살(菩薩)로 살아간다

 

 

지난 호의 대승(大乘)이란 무엇인가에서 대승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성문과 연각의 삶을 거부하고, 보살(菩薩)을 이상적인 삶으로 추구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번 지면을 통해 보살에 관한 설명을 조금 더 보태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법우께서는 보살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릅니까?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보살이라는 말은 여성(女性) 불자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거나, 심지어는 불교와 전혀 관계없는 무속인(巫俗人)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가끔은 많은 액수의 보시를 한 사람을 특별히 대보살(大菩薩)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보살이라는 말의 이러한 쓰임새는 본래 의미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서 이는 보살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그르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나마 불교 교리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는 보살이란 부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일부러 부처가 되지 않고, 많은 중생(衆生)을 구제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전혀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부처가 될 수 있는데도 굳이 부처가 되지 않고 보살노릇을 한다는 것도 참으로 어색하고, 마치 부처는 대중을 구제할 수 없고 반드시 보살이어야만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아서 억지스럽게까지 느껴집니다.

보살이라는 말이 참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보살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한 지경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보살(菩薩)’보리살타(菩提薩埵)’를 줄인 말인데, 이는 산스크리트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음역으로서 보디(bodhi;깨달음)’사트바(sattva;살아있는 존재)’가 합해진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보살을 단순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살은 이러한 소극적인 의미에 머무는 말이 아닙니다. 불교를 설명함에 있어서 보살이라는 말이 전면에 제시되는 이유는 항상 깨닫고 있는 존재(enlightening Being)’라는 현재진행형(~ing)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보살이란 항상 깨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제 깨달았다고 해서 오늘도 깨닫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한 오늘의 깨달음이 내일로 이어진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삶을 가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깨닫다라는 동사의 시제는 지금 여기에서의 깨달음이 항상 연속되고 있는 영원한 현재진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참생명의 실현에 있어서 완성이라는 고정된 상태는 있을 수 없기에 보살은 항상 깨닫고 있는 사람이라는 현재진행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매순간 무한히 깨달으며, 매순간 참생명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구도자, 이러한 사람을 일러 보살이라 합니다.


  

항상 깨닫고 있는 보살이 마주하는 현실은 항상 지금이고 여기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참고 살아야만 하는 사바세계가 보살이 마주하는 현실인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보살이 처하는 때마다 곳마다 깨닫고 있다는 것은 번뇌하는 가운데 삶의 본질이 그 가치를 더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보살이 깨달음을 얻는 도량(道場)은 먼 곳에 자리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삶에 걸맞는 갖가지의 번뇌가 따라오는 곳이 도량입니다.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주부보살은 주방이 도량이고, 운전수보살의 도량은 운전석일 것이며, 청소부보살은 쓰레기가 뒹굴고 있는 길거리가 도량일 것이며, 피아니스트보살의 도량은 피아노 건반이고, 화가보살의 도량은 캔버스일 것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의 참뜻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에 있어서 보다 살만한 가치를 갖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나 사상체계가 아니고, 허공에 뜬 관념도 아닙니다. 삶의 중심에 부처님을 모시는 생명의 약진인 것입니다. 대승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혼자만의 깨달음에 안주하는 성문과 연각의 삶을 거부하고 매순간 참생명을 구현해가며 살아가는 구도자를 뜻하는 보살을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삶으로 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같이 일어나는 번뇌로 달구어질수록 자신의 생명이 연마됨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보살은 번뇌의 현장에 기꺼이 뛰어들어 그 믿음대로 실천합니다.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성취가 다가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보살의 삶, 바로 진정한 불자의 삶입니다.


정리 : 범정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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