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보신문 <명법문 명강의> 코너에 실린 명성법사님 법문입니다.



“내 본래면목이 부처님 참생명임을 믿고 굳건히 정진해야”



법문_명성법사님(문사수법회 수련도량 정진원장)





정유년 음력 5월은 윤달입니다. 오늘은 윤5월 초하루를 맞아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는 고사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연성지벽’은 아주 귀한 옥이 돌로 쌓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귀한 옥이지만 겉은 돌로 쌓여 있으니 이를 육안으로 보면 무엇으로 보일까요? 아주 쓸모없는 돌로만 보이는 것이죠. 이 돌을 벗겨내고 나면 그제야 귀한 옥이 드러나게 됩니다.


중국 고사성어 ‘연성지벽’에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 담겨

고귀한 불성 가진 모두가
돌로 쌓인 귀한 옥과 같아
일상 속 육바라밀 실천으로
삼독 대신 참생명 드러내야
 



 여러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생의 가치는 ‘참생명’이며, 바로 부처님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진면목, 즉 진짜 생명은 부처님 생명입니다. 그러나 정작 여러분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고 있어요. 바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안이비설신의’라는 돌에 겹겹이 쌓여서 여러분 안에 귀한 옥이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연성지벽’을 통해 하고픈 말은 우리의 실존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실존, 즉 존재 가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우리의 삶과 생명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며 살고 있고, 또 바르게 보고 있나요?


‘연성지벽’은 중국 전국시대 때 있었던 일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입니다. ‘한비자(韓非子)-화씨편(和氏篇)’에 따르면 초(楚)나라에 화씨(和氏)라는 옥을 캐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가 산에서 일을 하다가 아주 귀한 옥돌을 발견해 왕에게 진상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보기엔 그냥 돌처럼 보이는 거죠. 왕이 감정사를 불러 이를 감정하게 했더니 역시나 “보통 돌”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해 화가 나서 오른쪽 다리를 자르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이어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또 그 옥돌을 왕에게 바쳤습니다. 무왕의 감정사 역시 “보통 돌”이라고 판단을 했고 무왕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 화씨의 남아있는 오른쪽 발마저 잘라 버렸습니다.


그래도 화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다시 옥돌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이미 형벌로 두 발이 잘린 상황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온 것이지요. 문왕은 화씨에 대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벌을 내리기에 앞서 돌을 옥이라며 계속 바치는 연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씨가 말하길 “형벌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보옥을 돌이라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문왕이 이 답을 새겨듣고 화씨가 진상한 옥돌을 다듬게 하니 비로소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이 돌은 정말로 진귀한 옥이었던 것이죠. 왕은 그 진실된 마음에 깊이 탄복해 세 개의 성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연성지벽’이라는 고사의 유래입니다.


‘연성지벽’이라는 이 옥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동안 여러분은 이 빛나는 옥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고 그 이치를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무명에 가려진 채 살아왔습니다.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사실 하나는 바로 여러분의 본래 면목이 부처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안에 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른 채 겉으로 드러나는 면만 알고 있으니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보니 우리 모두가 부처님 생명에 다름 아니다”는 진리를 밝게 깨달으신 분입니다. 깨달은 후 열반에 이르기까지 무려 45년간 일관되게 설하신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너희가 곧 부처다” “니가 부처다”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 생명임을 스스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걸음입니다. 이 진리를 부처님께서는 저 팔만대장경의 가르침 속에서 한결 같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결국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겨준 가르침은 “그대가 부처이니 부처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의 길을 따라 가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의 길로 가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여기에 대한 해답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으니, 바로 육바라밀의 실천입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곧 부처의 길을 가는 방법이니, 육바라밀을 실천하면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명료한 가르침인가요?


다만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과정이 얼마나 지속돼야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방법은 바로 경계를 만나는 것입니다. 경계에 부딪쳐서야 우리는 평소 육바라밀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살았는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경계를 만나지 않으면 스스로 잘 닦아 왔는지 어떤지를 도통 알 수가 없어요.


육바라밀을 통해 우리는 번뇌를 닦아 나갑니다. 바로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이 대표적인 번뇌입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의 번뇌들을 모두 벗겨내고 나면 ‘안의비설신의’에 겹겹이 감춰져 있던 참생명, 즉 부처님 생명을 분연히 알게 되고 그 생명의 가치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탐진치’라는 이 세 가지 번뇌는 참으로 지독합니다. 얼마나 지독하면 그냥 ‘번뇌’라고도 하지 않고 삼독(三毒)이라 할까요? 이 지독한 번뇌를 육바라밀로 제거해 나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지만 참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옛날 홍두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홍두 스님은 “부처가 되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금강산에서 용맹정진을 했어요. 그렇게 10년간 수행을 하고 나니 마음은 점점 넓어지고 혜안이 깊어지면서 온 우주와 삼천대천 세계가 내 손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더라는 거예요. 무엇을 해도 걸림이 없고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된 거죠. 그래서 “아, 이정도 공부했으면 완전히 깨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스님이 폭염 속에서 좌선을 하다가 정자나무 아래 누워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순간 바람이 부는 거예요. 바람에 날린 먼지가 누워있던 스님의 눈으로 들어갔어요. 눈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빨개진 눈을 비비며 아파하고 있는데 이번엔 갑자기 먹구름을 몰려오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집니다. 정자나무 아래 편히 쉬던 스님은 그만 쫄딱 젖어 형편없는 꼴이 돼 버렸지요.


스님은 비를 피해 황급히 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젖은 옷을 추스르고 아픈 눈을 살피는가 하더니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게 아닙니까. “신장님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또 관음보살 지장보살, 이 천지에 가득한 보살님들은 또 뭘 하고 있는거냐”고 하면서요.


대도(大道)를 이룬 스님의 눈에 먼지가 들어가도록 두고, 비에 젖어 옷이 쫄딱 젖도록 방치했다는 거죠. 바람이 이는 것도 못 막고, 내리는 비도 막지 못해서 이렇게 고통을 줄 수가 있냐는 원망을 가득 담아 한바탕 호통을 치고 나니 이번엔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쓰러져 끙끙 앓으면서 누웠는데 순간 선몽이 일었습니다.

꿈에 신장님이 나투어 “스님이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 오늘 결례를 무릅쓰고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뒤집어쓰게 했습니다”라고 하는게 아닙니까? 신장님이 보기에도 스님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물욕은 이미 초월해 탐심은 벗었는데, 다음 단계인 성내는 마음이 남아있는 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 테스트를 해본 것이지요.

공부가 됐는지 안됐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경계를 만나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이 홍두 스님은 바람이 불어 먼지가 일고, 그 먼지가 눈에 들어가니 고통이 솟고, 고통을 느끼니 화가 난 것입니다. 신장님도 “이 정도 가지고 화를 내다니? 그러면 이번엔 비를 내려보자”고 한 것이죠.

꿈에서 깨어난 홍두 스님은 한탄합니다. “내가 참 어리석었구나. 성내는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고 어리석음이 그대로여서 공부를 그르쳤구나.” 홍두 스님은 그때부터 다시 용맹정진을 해 결국 견성성불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일들이 나의 마음공부를 시험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경계에 마주했을 때 우리는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고민하고 자책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우리가 탐진치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일러주는 계기가 됩니다. 세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탐심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내는 마음을 극복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경전의 가르침을 굳게 믿는 마음으로 이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무량백천억겁 동안 아침, 점심, 저녁에 행한 보시의 공덕보다 낫다.”

하루 종일 보시하는 것도 공덕인데 이를 무량백천억겁 동안 했으니 얼마나 공덕이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 공덕조차 경전의 말씀을 믿고 거스르지 않는 공덕보다 작은 거예요. 그 경전의 말씀이 무엇인가요? 바로 “너의 참 생명이 부처님 생명”이라는 진리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돈에, 혹은 쓸데없는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 일이 있어요.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도 본래 마음속에 부처님 생명이 있는 거예요. 그들이 언젠가는 부처님 생명의 씨앗을 발현해 참된 삶을 살기 위한 인연공덕을 닦을 수 있도록 우리들이 부지런히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믿고 정진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마음을 닦아야지요.

우리가 불자로 산다는 것은 내 본래생명이 부처님 생명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육바라밀로써 이를 실천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윤달을 맞아 오늘 이 자리에서 ‘연성지벽’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아봅시다. 지난 삶을 돌아보고 참회하고 또 발심하는 윤 5월이 되길 바랍니다.

정리=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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