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얘, 나를 바꾸니 정말 세상이 바뀌더라

구미라 2009.09.16 조회 수 3806 추천 수 0
 

풍경이 바뀌었다.

  답답하게 다닥다닥 붙어선 건물더미들 사이로 어느새 여유가 생기고,  눈발이라도 날릴 듯 음울하던 하늘빛도 제 색깔을 찾고 있다.  막혔던 호흡이 터지고 서울을 벗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이 밀려온다.  문득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고,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계속 새어난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제 곧 원당역인데,  입가로 새어나는 웃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아마도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듯싶다.

  내가 처음 문사수법회를 찾았던 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의 일로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때였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갈등과 회의로 방황하고 있었다.  몇 년간의 일본유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힘들고 가난한 유학 생활보다 몇 갑절 더 큰 어려움과 정신적 허기로 탈진해가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쉽지 않은 외국유학 생활이었건만,  이국 땅에서 만난 한 친구와의 잦은 불화로 늘 마음이 어수선했고,  그런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친 듯이 신앙에 매달려 있었다.

  유학시절에 나는 유학생들과 교포들이 주로 다니는 한국 절에 나가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곳에서 많은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망과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곳 신도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불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들 뿐이었다.  부처님 법이 그러하지 않을진데,  그들의 모습 속에는 여전히 미신과 이기가 있었고, 자신의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중생의 모습만 있었다.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일본에서 처음 만나  ‘ 가장 좋아하는 이’  라는 말을 마음에 담게 했던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는 철저한 교육과 신앙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일들을 실천하며 그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려는 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때로는 광신적이라고 매도하기도 하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 찬 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며 쏘아부치기도 했다.  물론 지금 돌이켜봐도 그들의 모습이 모두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친구를 몰아세우던 그때의 내 모습 안에 질투와 부러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 내가 나가던 절의 법우들과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절에 와서 마음 편안하고 사람들 만나 즐거우면 되는 것 아니냐며,  자신있게 말하던 법우의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과연 그런 것일까.

  나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던 법우의 마음에 불교는 없었다.  부처님은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 또한 없었다.  그저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는 관광객의 모습뿐이었다.  자기를 죽이고 이기를 버리는 자비나 보살행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법회에 참석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기복적인 믿음이 주는 기쁨만이 충만 ( ? ) 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도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내 마음에서 조금씩 불교에 대한 회의와 실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다.

  스님이나 법우들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믿어 불교를 해야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머리속에서의 일일 뿐이었다.  여태껏 불교를 한다고 자처해왔던 내 안에 불교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이 없음에 실망스러워 기도도 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와의 사이에도 크고 작은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 불화들로 늘 상처받고 마음 아파 울었다.  늘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친구 쪽이었고 나는 상처받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친구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사랑과 미움 사이를 오고가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사랑한 것만큼 보답 받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아파할 때,  문사수법회를 알게 되었다.


  그런 내 상황을 넋두리처럼 법사님께 늘어놓았고  법사님께서는 함께 공부하기를 권하셨다.  추락하려 하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법사님께선 귀찮은 내색 한번 없이 시간을 내주셨고,  나는 처음으로 되돌아가 신앙인되기,  불자(佛子)되기에 들어갔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힘든 과정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습을 버리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엔 리포트를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삼칠일간 정진에 들어가고 다음은 백일정진에 들어갔다.

  학원 강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수업 준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쫒기는 상황이었던지라,  게으른 내 몸이 나를 자꾸만 주저앉히려 했다.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다.  법회가 있는 일요일에도 갈까 말까 갈등의 연속이었다.  게으른 내 육신은 그냥 집에서 쉬라고 자꾸 나를 충동질해댔다.

  법사님께서는 끊임없이 내 인식들을 들쑤시고 뒤집어 놓았다.  왜 ?  라며 던져오는 법사님의 질문들로 내 머리 속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했고,  차라리 몰랐을 때가 더 편안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인식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모든 것을 뒤집어엎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나로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들이었다.  내 일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원당으로 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서 교대역의 홈에 서 있을 때였다.  지하철역 홈의 벽에 이런 광고가 붙어 있었다.

 ‘ 가끔은 거꾸로 뒤집어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 ’

 ‘ 그래,  바로 이거다 ’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그 광고가 붙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동안의 정진이 그 광고를 나의 인식 안으로 끌어들인 것 같았다.

  모든 답은 내 안에 있었다.

  친구에게로 퍼부어 대던 원망과 미움은 모두가 내 스스로 키워 놓은 것이다.  인식의 틀로 나를 묶어 내 스스로 상처받았다고 규정지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내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었다.  상처를 주지도 아픔을 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하찮은 광고문안 속에서 발견하다니….

  갑자기 머리 속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의 정진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으며, 법사님께서 내게 수없이 던지던 왜?라는 질문과 모든 것을 뒤집어서 생각해보자시던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후로 차츰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음을 이제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기도가 이제는 정말로 정진이 되어 있었다.  마음에  확실한 믿음이 있고 두려운 것이 없는데,  굳이 무엇이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만이 있었다.

  이제는 참으로 실망할 일도 없고 그저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 일밖에 없다.  그래서 자주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난다.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낯선 이가 사랑스러워 보일 때가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요즈음에는 내게 이런 말을 한다.
' 법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 ' 고.  대체 법사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교육을 시킨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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