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친구야, 너는…

허 소 영 2009.09.16 조회 수 3683 추천 수 0

죽음은 애쓰지 않아도 삶을 영위하고 있는 동안에는 잊혀져 있다. 공기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다가 내 가까운 사람이 그것을 맞이하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움찔 놀라면서… 특히나 짧은 생애를 마감한 경우라면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가끔 태어나는 순으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순진한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 전 친구의 죽음을 맞았을 때,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에게도 죽음은 실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양식이라지만 그 순간 느꼈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는 그 친구와 내가 했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사춘기를 지나 만난 사이였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조언자였다. 삶의 구비마다 밤새워 전화를 붙잡고 서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충고와 조언을 주고받았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사려 깊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 욕심 없었던 햇살 같은 친구에게 찾아온 병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 친구는 죽음으로 향해갔다.

전화 한 통화, 얼마나 맑은 목소리였는지… 방사선 치료 중인데도 불구하고 아픔을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정리하는 것 같았다.

 

산 사람들이 죽음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 동안 친구가 어떤 생각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궁금해졌다. 기독교가 모태 종교였던 내 친구는 그 목사님 말씀대로 하느님 곁으로 간다는 믿음으로 눈을 감았을까?

내게 죽음이 일시에 닥쳐오면 나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을까? 삶의 순간 순간마다 물질이나 사람이나 내게 있는 모든 것에 일시적으로라도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래서 그 순간 ‘이게 뭐야’ 하며 ‘나무아미타불’ 하지만 한번 나무아미타불로 안 되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물며 삶에 대함에랴…

모든 것의 원인은 집착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데 나만이 고정된 실체 그대로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대답은 없다.

법사님 말씀대로 너와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인데, 좋은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단지 이 인연이 짧아서 너무나 슬프지만, 그래서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이 일을 어떡하나 하는 우왕좌왕이 아님은 분명하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난 속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간절함을 담아서…

친구는 기분 좋게 갔다고 했다. 아무런 원망도 없이 정리하고 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친구 남편은 무력감과 죄책감에 빠져있었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내의 죽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스스로 나올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밖에 없음을, 모든 것은 그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깨닫는 것을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다.

 

다시 정진과 염불을 하리라.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닌 일상 생활과 삶에서 죽음을 화두로 삼아 집착의 연결고리를 하나씩 끊을 수 있는 간절한 정진이 되도록 하리라. 어디 어느 곳에 부처 아닌 존재가 없고 부처님 없는 곳이 없듯이 내 친구 또한 내 곁에 살짝 머물다간 부처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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