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선택은 자유

김 영 애 2009.09.16 조회 수 3696 추천 수 0

법우지에 뭘 쓸까 고민하면서도 내용을 위한 고민보다 나를 더 잘 보이기 위해 고민하는 나와 만나게 된다. 법우님들의 정진의 향기가 묻어나오는 법우지를 대할 때의 잔잔한 감동과 감사함을 생각하면 글쓰는 기회가 주어짐에 오직 감사해야 할 일이건만, 어떤 내용으로 나를 포장하고 인정받을까 고심하고 있다니… 부끄럽다. 그 덕에 염불할 수 있으니 감사해야겠지.

요즘은 모두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를 만날 때 감사함을 느낀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데 같기를, 그것도 나의 습관과 같기를 원하는 데서 늘 시비가 발생함을 본다. 나의 기준과 익숙함으로 사람을 대하니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나를 세우는 마음이 부딪힘 속에서 무너져가니 반가운 충돌이라고나 할까.

 

예전에는

특히 나에겐 이른바 사회적·도덕적 규범 속에 사람을 가두는 경향이 심해서 초등학교에서 배운 질서의식에 위배되면 아주 민감해지곤 했다.(과거형? 지금은 아니 그렇단 말인가?)

엘리베이터나 지하철에서는 내리는 사람이 먼저고 타는 사람은 나중, 쓰레기는 반드시 휴지통에, 거리에 침뱉기나 담배꽁초 버리기는 절대 금물. 연락처도 없이 주차장 입구를 막은 차를 만나기라도 하는 날엔 ‘아 뭐 이런 게 다 있어, 귀신은 뭐하나 이런 애들 안 잡아가고’라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한 5분 씩씩거리고 나면 비로소 ‘내가 지금 왜 이러지?’ 하며 정신차리게 된다. 벌어질만 했으니 벌어진 현상이고, 현상이란 것은 말 그대로 겉모습에 불과할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닌데도 잘잘못을 따지고 화내며 5분간의 지옥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러면 안된다 저러면 안된다 하는 것들은 행복하게 살자는 취지에서 만든 시대에 맞는 하나의 기준에 불과한데, 마치 만고의 진리인 듯 기준 하에서 사람을 대해온 나. 기준이 지켜지지 않아도 생명은 여전히 존귀한 것을, 행동을 나무라는 것을 넘어 인간 자체를 아주 무시해버리곤 했으니… 생명이 먼저가 아니라 규범이 먼저였던 거다.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는 밑변에는

‘난 적어도 너같은 행동은 안한다’

‘난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올바른 인간이다’

‘내가 맞고 넌 틀렸어’

라는 교만심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의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건 내 기준이 먼저이기 때문이지 결코 그 사람이 잘못되어서가 아님을, 또 나는 틀리다고 지적하는 저쪽의 행동이 정작 저쪽에게는 하늘이 두쪽 나도 잘못한 게 없는 행동일 수 있음을 요즘에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어디서 누굴 만나든 나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 만나자고 다짐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나와 따로 나뉘어질 저쪽이 없다고 하시는데도 내 삶은 온통 저쪽과의 부딪힘 투성이…

마주 걸어오던 사람이 바로 앞에서 갑자기 로보캅∼투∼하며 가래침을 뱉는 통에 내 속도 확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그가 뱉어놓은 거대한 침 주위를 지나가자니 기분이 영 아니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그를 지나쳤다.

화는 낼 수 있어도 대화는 할 수 없는 감정상태 때문에 내 의사를 제대로 전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다른 이에게 불쾌감을 주고, 함께 사용하는 거리를 지저분하게 하니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지도 못하고, 서로의 마음만 상했을 테니까…

설령 입으로는 이치에 맞는 바른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 저쪽을 무시하고 있는 한 고운 투로 나갈 리 없고, 그 마음을 전달받은 저쪽이 그 행동을 수정할 리 만무하다.

 

다행인 건 부처님 덕에 그 정도라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예전 같았으면 내 감정을 겉잡을 수 있건 없건간에 보는 순간 바로 말이 튀어나갔다.

‘넌 잘못했어. 이렇게 하면 안되지. 담부턴 절대 그러지 마’ 하는 식의 일방적인 비난, 훈계. ‘나 있음’을 주장하는 말들. 그럴 때 과연 저쪽이 받아들일 것 같은가? 진정한 수정은 상대에 대한 인정과 긍정 속에서 이뤄진다고 믿는다. 거부당하고 부정되는 불안한 상태에선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무조건 인정하자고 마음 먹는다. 저쪽은 충분히 저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저러고 있는 저쪽도 저걸 바라보는 나도 없음을 깨닫는 염불에 귀기울이자고 다짐한다.

 

‘나중에 짜맞추기 식’

화낸 후에야 ‘저분은 침 뱉는 모습으로 다가온 부처님생명이야, 암, 부처님생명이구 말구. 어떻게 한가지 행동만 보고 사람을 평가할 수 있겠어, 아니 평가라니… 가당치도 않지. 감히 내가 어찌 저 부처님생명을 저울질 할 수 있겠어, 내가 속고 있는 거야. 헛깨비랑 씨름하는 거야. 오직 부처님생명이야. 침 뱉는 거 보고 나무아미타불 한번 더 하니 고마운 거야. 그래, 염불 들려주시려고 일부러 침 뱉는 모습을 보여주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늘 후불식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나.

그래도 더 이상은 화를 내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다.

내 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대긍정 안에서 후불식이 아니라 ‘지금 바로 긍정’의 현찰식으로 변하리라 굳게 믿으며 오늘도 나무아미타불…

 

근데 중요한 건

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느냐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 어째서 내 눈엔 침 뱉고 쓰레기 버리는 사람이 자주 보이는가 말이다. 그때 그 시각, 내 옆을 지나는 이가 꼭 그 사람만 있었겠는가. 아름다운 꽃을 든 싱그러운 미소의 여인이 지나갔을 수도 있거늘 난 하필 침 뱉는 이를 본 걸까?

결국 내가 그런 사람들을 찾고 있음이다.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 보이는 것이고 부딪혀서 나를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부딪히는 것이다. 내 선택에 의해 이뤄진 일들인데 난 그들을 탓하며 실갱이를 벌이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니 이왕이면 칭찬거리를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의 선택

누군가에게 화가 나있고 몹시 서운할 때도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물어보면 혼자 스스로 그러고 있는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 ‘스스로’가 정말 중요한 대목이다. 스스로… 누가 던져준 것도 아닌데 혼자 껴안고 끙끙댄다. 진짜 저 쪽이 나 화나라고 그런 게 확실하다면, 오히려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 서운하게 한 게 있으니 도리어 그걸 알아내어 사과하고 마음을 풀어주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저쪽이 나 화나라고 그랬다는 증거도 없으면서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삐진다. 그것두 나의 선택. 마음에 불길이 치솟는 것도 나의 선택,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것도 나의 선택. 뭘 선택하며 살 것인가.

선택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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