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나의 극복

안 정 균 2009.09.16 조회 수 4101 추천 수 0

안녕하십니까? 문사수 대전 법당의 혜심입니다.
길지는 않지만 저의 종교 편력과 방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염불을 만난 것은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에 의해서였습니다. 눈이 어둡던 할머니는, 마당에 심었던 율무를 말려서는 염주를 만드시려 실로 꿰는 일을 제게 부탁하곤 하였습니다. 나가 놀고싶은 마음으로 가득찬 제게 천개의 염주를 무명실에 꿴다는 것은 참으로 수행에 가까운 일입니다. 천개를 세는 것이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금방 끝날 것 같아서 무조건 염주를 빨리 끼고는 나가 놀 마음에 천 개를 세는데, 한참을 세고 있으면 할머니가 말을 시켜서 몇 개를 세었는지 까먹어버려 여러번 세어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자한 얼굴로 허허! 하시던 할머니. 그 할머니를 통해서 처음으로 염불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할머니께서는 아미타불은 착한 일 많이 하다 죽으면 만나는 부처님으로 연세가 많은 분이 외면 극락에 태어난다고 했으며, 관세음보살은 어려운 사람이 외면 어디를 가거나 도와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늙으신 할머님은 천주 염주를 손에 걸고 하루종일 염불하십니다. 할머님의 관세음보살은 가족의 안위와 안녕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신의 극락왕생보다는 자손의 건강을 염원하는 관세음보살 염불이 더 잘된다 하셨던 할머니.
그 할머니를 보면서 ‘염불을 하면 깨우치는 것일까? 글자 한자 읽을 줄 모르는 할머니가 어떻게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극락에 갈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깨닫지는 못할 거야. 할머니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너무 무지(無知)하거든’ 하며 혼자 생각하였습니다. 염불하시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시절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염불은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기복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구나’ 하는 생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어머니가 몸뻬 만들기며 명주실 뽑기를 부업으로 할 때 옆에서 거들면서 테이프로 된 천수경을 함께 듣고 외운 것이 첫번째 불경(佛經)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아무런 뜻도 모르면서 천수경을 같이 외웠습니다.

이렇게 불교를 시작했습니다.
불교공부를 열심히 해서 깨달으면 온 세상의 이치가 온전히 드러난다고 하고, 우주의 참된 이치도 보인다고 합니다. 얼마나 환상적인 말입니까?
고등학교 시절에 무릎을 다쳐서 2달간 쉰 적이 있는데, 그때 당시로서는 지루하기만 했던 금강경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항하에 있는 모래수’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말하는 개수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면 우주의 이치도 이해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위해 불교 책을 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한시(漢詩)도 약간의 멋으로 외우고 한자(漢字)도 몇 자 알게 되던 고등학교 시절에 한용운 님의 ‘알 수 없어요’ 라는 시와 ‘님의 침묵’을 통해 본 불교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단하다는 의미는 알 듯 알 듯하며 모르는, 어렴풋이 어느 정도 의미를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쓰고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쓰는 것은 한문공부였고 외운다는 것은 멋이었습니다. 천수경의 의미도 한자를 해석하며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관세음 보살의 위대한 신통력을 보며 ‘불교공부를 하면 이런 신통력이 생기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야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로동에서 못 배운 누나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자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야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야학은 학교공부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야학 선생님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책의 성격이 거의 민중교육과 관련된 공부였습니다. 학교를 부정하는 책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민중 교육에 대한 책과 더불어 성경도 조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사회과학과 정치경제학 등을 친구들과 공부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였습니다. 사회와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며, 세상을 그 틀 속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진정으로 행동하는 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들로 가득찬 세월이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독서하면서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열정과 노력이 나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때 제 눈에 비친 세상은 고쳐야 할 대상들로 가득차 있었고, 어디 하나 온전한 곳이 없는 타도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당시 제 눈에 비쳤던 불교는 산송장과 같았습니다. 권력의 압제 속에서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조직에 지나지 않는 보수 반동세력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이 당시를 주도하던 개혁세력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천주교인들, 그리고 학생들이었으며 야학도 교회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배들과 잦은 사상 충돌이 생기고, 조직적인 행위에 대한 많은 회의가 올 때쯤, 제가 살던 집을 경찰이 수색하였고, 야학은 와해되었으며 저는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갈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공대생(工大生) 선배들 거의 대부분이 대학원에 진학하고 병역특례를 받거나, 석사장교라는 짧은 군생활로 끝내는 경우가 일상적인 진로였기 때문입니다.

이 방위생활은 정말로 걸작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다시 인생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력으로 분류해 보면 학교를 거의 다니지 않은 국졸, 중퇴, 중졸, 고퇴, 고졸, 대재, 대졸, 대학원 졸, 박사과정 등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또한 직업도 가지가지여서 찍새, 바텐더, 목수 등 어려서부터 막일을 하며 자라온 사람부터, 눈이 나빠 방위가 된 고학력의 대학강사, 그리고 돈이 없어서 집안의 입하나 덜어 보기 위해 현역으로 지원했는데도 방위병이 부족해서 방위가 된 사람, 돈으로 방위병이 된 사람 등, 사연도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인간 시장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며 매일 서로간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훈련을 마친 후 인사병이 되었는데 이때 두 명의 특별한 분을 만났습니다. 한 명은 대학에서 투쟁위원장을 하던 선배로 보안사에서 항상 주시하는 현역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부산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사람으로 군면제 대상인데도 군대에서 새로운 인간을 기대하며 현역지원을 요청하였다가 키와 몸무게가 너무 작아 방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현역 선배와는 사상에 관한 토의와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방위병 선배는 처음으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불교를 잊지 않게 해주신 분입니다. 이 방위병 선배는 자신이 고참이면서도 매일 일찍 와서 청소와 궂은 일을 하였고, 보초를 서면 늘 염불하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청소하겠다고 하면 이분은 항상 노는 손에 마당 쓸고, 노는 입에 염불한다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하루는 이분에게 사회과학을 전공하신 분이 투쟁이 아닌 힘없고 부패한 불교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였더니, 참으로 불교만이 개인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였습니다.
성실하고 삶에 모범이 되던 이분을 통해서 잠시나마 무시하고 잊어버렸던 불교의 참모습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보초를 서면 이면지에 반야심경을 항상 썼습니다. 무료한 시간도 잘 가고 의미도 새기면서 버릇처럼 하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분에게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하였을 때에는 이미 제가 보아온 학교와는 전혀 다른 논의가 진행되는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조직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몇몇 친구는 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중과 괴리된 관념과 급격한 폭력투쟁만으로 얼룩진 학교에서 스스로 격리됨을 느꼈고,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원을 마쳤습니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그 때 맛보았습니다. 그 이전까지 저는 인생에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못할 뿐이지 안되는 일이란 없다는 확신에 차서 살던 생활에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가끔 손발이 저리고 호흡곤란이 일어나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계속되었습니다. 정신과에서 정신감정을 받으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묻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있는 무언가에 의한 압박을 제가 알 수는 없었습니다.

더 이상 사회적인 관심은 나에게 평안과 건강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책을 보게 된 것이 노자, 장자, 선불교 등입니다. 그렇게 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은 다양한 종교들과 만났으며, 여러 가지 것들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종교에 대해서는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종교 편력은 종교간의 다양성과 공통성에 대한 이해는 가져왔지만, 결과적으로 제게 있어 구원은 더욱 더 멀어지고, 평화는 너무나 먼 사실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입사한 회사에서도 가끔씩 그런 장애가 발생하여서 동료의 도움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잠을 자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죽음으로 떨어질 것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지속적으로 짓눌렀던 시기였습니다. 술을 마시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셔야 했고, 다음 날은 술로 인해 너무나 고생하였습니다.
이 당시 제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모순덩어리로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연구소를 따라 대전으로 내려왔습니다. 연구소 동료들 모두가 하나같이 혼자 살다 보니 저녁시간은 술자리와 유흥문화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렇게 6개월을 보내니 체력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 하나 둘 대전으로 이사오기 시작하면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갔지만, 총각인 제게는 너무나 많은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녁이면 TV도 없고 전화도 없이 달랑 라디오 하나만 있는 집은 너무 많은 여유와 시간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래서 술 대신 운동을 선택하였고 미친 듯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연구소 동료들과 함께 새벽에 동학사에서 108배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부처님 전에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절에 갔다고는 하지만 법당에 들어가서 절하고 싶어도 부처님의 원만한 상이 우상으로 보였기에 항상 관광객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문고리만 잡고 벌벌 떨다가 돌아간 적이 너무나 많았던 이전에 비해보면 이 때의 마음은 이전과 많이 달랐습니다.

너무도 지쳐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이상은 힘들게 나를 이끌고 다닐 수 없었으며,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속의 갈등들을 미봉책이 되더라도 잠재우고 싶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은 내 자신과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이것이 저의 초발심(初發心)이 되었습니다.

 

회사 동료들과 만남이 어느 정도 계속되면서 불교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정진할 수 있는 곳이 없을까 하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다가, 문사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사수에서 올린 글을 읽으면서, 문사수라는 분이 참으로 정진을 바탕으로 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으며, 그래서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고 들어온 책이나 이야기는 법구경(法句經)과 같은 경전을 베껴 올린다거나, 무미하고 익숙한 내용들로 고통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연락처가 적힌 곳에 전화하였습니다. 그렇게 대전 문사수법회 회장인 남영우법우님을 만났습니다. 남법우님은 마침 저희 연구소 건물에 파견을 나와있는 상태여서 바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만나서 문사수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수행공동체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이때까지 저는 문사수가 개인의 이름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는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탑스님의 법문은 제가 들어온 그 어떤 말들보다도, 그 어떤 책보다도 살아있는 충격이었습니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마치 양은냄비처럼 끓어올랐고 그 마음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 부인인 혜복화법우에게 불교공부를 하러 대학에 다시 입학해도 좋을지를 상의하였으며, 마음 착한 법우는 그렇게 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법사님께서 법문하시던 날, 집으로 초대해서 상의했는데, 법사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위해 불교공부를 하려고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내 문제라고만 했더니 그런 것은 학교에 가서 배울 것이 아니라 법회 안에서 함께 공부하자고 하셨지요. 그리고 나서도 성이 차지 않아 광주에 며칠 출장갔을 때, 정진원에 머물며 한탑스님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기억됩니다.

돌아온 후부터는 어느 정도 충실히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대부분의 법문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어느새 법문은 매번 같은 소리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처음의 신선함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진정 자신의 수정을 위한 정진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또다시 지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는 동안 회사 동료들도 법회에서 자기의 평화를 구하지 못했는지 몇 번 나오다 안나오기 시작했는데 계속 나오도록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 또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곳에서 스승을 만나겠지’라고 생각하며 부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혜심(慧心)이라는 법명(法名)을 받았지만 그 이후로도 제 습(習)을 버리지 못하고 관념의 바다를 헤맸습니다.

 

그러던 지난해 보고싶다는 보원법우의 전화를 받고 주로 함께 식사한다거나 연등을 만든다거나 할 때 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수련회에 다시 참가하게 되었고 그 이후 혜복화법우는 9월부터 년말까지 100일 정진을 하며 신앙심을 키우고, 저도 서서히 신앙의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법회에서 저를 챙겨주시는 법사님들의 은혜 덕에 법회가 새롭게 제 생활의 중심으로 서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상 똑같은 말씀으로만 들리던 법문이 아주 새롭게만 느껴져서 항상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샛길로 빠질까 걱정스럽기만 하던 여여법사님의 법문은 너무나도 현실감 있고 살아있는 법문으로 다가왔으며, 특히 정해 법사님의 법문은 핵심과 본론에 충실하여 제게 항상 좋은 법문이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법회있는 날이 자연스럽게 기다려지고 좋아졌으며,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법우들의 크나큰 원력이 보이면서 법우님들이 너무나 대단해보이고 좋아졌습니다.

회사생활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입에서 나무아미타불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고 스스로에 대한 무한능력을 조금씩 확신해 가게 되었습니다.

직장도 참생명과의 만남이 있는 법당으로 변해서 잠시 쉬는 시간에는 부처님 법에 의지한 말과 법문을 동료들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동료에게 제대로 불교 공부하자고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한꺼번에 풀리고 있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돌이켜 봅니다. 그 길고 길었던 방황에 이제는 지향점이 생기고 있음을 다소나마 느낍니다. 앞으로도 방황은 계속될 지 모르지만, 이제는 방황을 해도 길 잃지 않고 참생명의 도량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법문을 들어도 무슨 책을 보아도 자신감이 싹틉니다.

절 벽화에 심우도(尋牛圖)가 있지요. 소를 잃어버려 헤매는 모습, 한참을 찾던 소 발자국을 발견할 때의 기쁨, 소 발자국을 더듬어 소를 발견할 때의 모습, 그리고 그 소를 집으로 우격다짐으로 끌고오려는 모습. 이런 모습이 바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복잡하기만 하던 머리는 너무 단순해져버렸습니다. 생활도 단순하고 사고도 단순해졌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무한광명의 무한능력 속에 있기에 방편은 많이 늘었습니다. 쓸데없을 것 같던 잡다한 지식들도 어렴풋하나마 이제는 한 곳으로 정리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법우님! 만약 저와 같은 행태로 고민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나무아미타불 하십시오.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는데 관심이 있거나 모양으로만 신앙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내려놓으십시오. 이런 접근 방법은 자신의 문제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둘로 나누는 것이며 자신의 근본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머리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따뜻한 가슴에 부처님과 보살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공덕과 무한능력이 여기에서 발현되고 있음을 귀기울여 들어보려는 정진을 하십시오. 정진의 도량이 바로 내가 일하는 직장이며 가정임을 잊지 마시고 머리로 이해된 것을 자신이 있는 도량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님의 염불과 어머님과 듣던 천수경, 우주를 세며 겉 읽던 금강경, 그리고 방위병 시절의 황일병, 문사수법회의 모든 법사님, 그리고 모든 법우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다양한 모습으로 제 앞에 현신(現身)하셔서 가르침을 주신 모든 불보살님께 귀의하며, 참 진리에 감사하며,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법회를 지켜주셔서 이 도도한 흐름에 함께 할 자리를 보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회향합니다.

그리고 만생령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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