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아, 그 여름 담양의 정토사여

한 소 자 2009.09.16 조회 수 4783 추천 수 0

공식일정 내내 게릴라성 집중 호우가 전국을 강타한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 4일 동안 담양의 염불도량 정토사에서 수련법회를 치루었습니다.

 

지난 수련법회를 생각하면 아미타불을 모신 찜통이었던 법당과, 모기 개미가 붙는 눅눅한 대중방이 문제 되지 않고 염불과 정진으로 자신을 되돌아본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사실 그곳이 문사수 수련법회가 열리는 곳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3박 4일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인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그만큼 여기저기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법우님들의 배려가 있었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다른 조건들을 잊게 해준 법사님들의 노고가 있었던 덕분입니다.

 

수련법회 기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회향일에 정토사와 문사수의 인연에 대한 명성법사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문사수 초창기의 이야기중에서 노보살(老菩薩)님과 관련된 50만원 이야기는 제 가슴을 찡하게 했고, 한편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게 했으며, 문사수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로 하여금 그 노보살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노보살이 되도록 하겠다는 하나의 원(願)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또한 정토사에 다녀가는 분들이 ‘세 번 놀란다 - 기대만큼 크지 않은 정토사의 규모에 놀라며, 스님의 설법에 놀라고, 집에 돌아가서는 자신의 변한 모습에 놀란다 - ’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저 또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수련법회 전체의 일정을 돌이켜보면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날 저녁예불 후에 있은 찬탄 염불에서 문준영 법우(4살)의 그 아름다웠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고, 부촉 염불 시간에 나를 문사수에 오도록 이끌어준 조군자 법우와 마주 앉아 찬탄한 기억이 지금도 가슴 벅차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날 비가 오는 데에도 불구하고 추성교 건너 넓은 운동장에서 발야구와 줄넘기 등을 한 것은 평소 같으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저를 감동시킨 일은 나다니기 불편한 보여 법우님이 그 빗속을 뚫고 부산에서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평소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선뜻 나서지 못했던 제가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저녁예불 후에 조별 여시아문(如是我聞) 훈련 게임 또한 생소한 경험이었고, 유쾌한 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정신법사님께서 생각한 것만 보인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같은 그림을 보고도 참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반야조의 조장이던 조용준 법우는 재치있는 행동으로 다른 조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두 번의 게임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셋째날은 비 때문에 보리암 산행 대신 16세기 문화와의 만남의 기회가 된 송강정(松江亭)과 소쇄원(瀟灑園)을 돌면서 개인적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 아마도 부처님께서 소쇄원을 보고 싶어한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비를 내리셨나 봅니다.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한글로 노래한 가사문학의 대가(大家) 송강 정철(松江鄭澈 1536-1593)은 당쟁 속에서 담양에 내려와 사미인곡이라는 아름다운 글을 후세에까지 남긴 분입니다. 그렇지만 정치가로서는 이곳 동인(同人)들에게 냉혈적인 처단을 했던 이중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정철이 기거했던 송강정(일명 竹綠亭)은 팔작지붕의 전형적인 정자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체를 가졌는데 주위에는 담백한 문기(文氣)가 밴 솔들이 울울히 우거져 있어, 전망이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인 곳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곳에서는 좋은 글이 나올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강정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원인 소쇄원은 자연의 일부[계곡, 바위, 꽃과 나무 등]를 이용하여 건물배치를 한 특이하고 신비스러운 곳. 비록 갑자기 억수같이 퍼부은 비 때문에 계곡물이 흙탕물로 변했지만 너무 잘왔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수련법회의 공식일정을 마치고 화순의 운주사(雲住寺)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상념이 머리를 온통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운주산 아래 그 넓은 곳에 왜? 누가? 천불천탑을 세웠을까? - 현재는 70개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 비록 비 때문에 구석구석을 돌지는 못했지만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탑과 돌들은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고 먼 훗날까지 운주사의 매력은 나를 사로잡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담양에서 보낸 3박 4일의 일정은 막을 내리고 있었지만,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집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정진하도록 하셨습니다. 집에 오는 길이 12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의 교통 상황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가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염불도량 정토사! 법우님들의 수련장으로 언제까지나 자리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음식에는 오직 정성이 있을 뿐인데 대나무 자생지역인 곳에서 죽순을 소재로 한 소찬(素饌)이 있었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수련법회를 다녀온 총 소감으로 법우님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정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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