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자꾸자꾸 ‘나불’거립시다

박 종 린 2009.09.16 조회 수 3713 추천 수 0

말은 침묵의 찌꺼기입니다.

침묵이 있은 다음 말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태초의 말씀은 침묵을 배경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침묵을 거치지 않은 말은 참된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침묵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치지 않으면, 소음에 불과합니다. 소음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성인들의 말씀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오랜 침묵의 숙성 끝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훌륭한 분들은 다 말을 극도로 아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르고 또 걸러서 군더더기를 없앤 다음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말이 심금을 울립니다.

말을 하되 침묵을 거친 후에 해야 하고, 그런 말이라야 말이 지닌 본래 기능을 다하게 됩니다. 입이 있다고 해서 다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닙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자신의 입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의 귀를 망가뜨릴 뿐 어느 쪽에도 이롭지 않습니다.

말은 혓속의 혀로 하고 귓속의 귀로 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키고 또 삼켜서 앙금같이 남는 말만을 내뱉을 때, 비로소 우리 귓속의 귀에 들리게 되고 그런 말이라야 오래오래 남게 됩니다.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말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을 하고, 또 이런 말을 찾아들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듣습니다.

말을 함부로 내뱉고 그 말에 집착해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이렇게 말끝을 쫓다보면 본질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말은 마음의 일부분밖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한 부분에 불과한 말을 가지고 전체 마음을 헤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말은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말이 아니고는 달리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말로써 의사소통합니다. 부처님과 가섭존자와 같이 염화미소로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그렇지 않는 한 말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왕 말없이 살 수 없는 노릇이라면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 닦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또한 마음을 제대로 닦기 위해서는 마음 닦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 닦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닦는 가장 손쉬운 방법중 하나가 바로 ‘나불거리는 일’입니다.

나불거린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나불거린다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불거린다는 말에는 다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나불’은 ‘나는 부처[我佛]’라는 뜻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는 중생이고 부처는 내 밖에 따로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날 때부터 부처이지 중생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기는 중생이라고 고집을 피웁니다. 이처럼 자기를 중생이라고 주장하므로, 부처가 따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 밖에 부처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로만 부처일 뿐, 부처가 아닙니다.

내가 본래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한, 나는 중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은 어디까지나 중생일 뿐,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본래 중생이 아니라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이 ‘나’에는 ‘참나[眞我]’와 ‘거짓 나[假我]’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나는 부처인데 거짓 나는 중생입니다.

그래서 참나를 나라고 생각하면 나는 부처이고, 거짓 나를 나라고 생각하면 나는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라고 하는 것은 참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불자(佛子)는 참나를 믿고 참나를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자들은 모두 부처이지 중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로 부처라는 생각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부처임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나불거리는 일입니다. 나만이 부처가 아니라 너도 부처이고, 우리 모두가 부처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되새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자꾸 나불거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나불’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준말입니다. 염불의 최고봉은 아미타 염불이다. 아미타 염불은 염불 중의 염불입니다. 모든 염불의 근원입니다.

우리나라 불교신자들은 관음염불을 많이 하다보니까, 아미타염불은 생소하게 느낍니다. 더구나 아미타염불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염불로 생각하기 때문에, 장례식이나 사십구재 때만 하는 염불로 착각합니다. 저승길이 멀지 않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극락왕생하기 위해서 하는 염불로 생각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젊은 사람들은 아미타 염불을 하지 않습니다.

관음염불은 그냥 ‘관세음보살’이라고만 부르지만 아미타염불은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은 법신불(法身佛)로서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 즉 한량없는 빛과 한량없는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뜻입니다. 또한 한량없는 빛과 생명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무한(絶對無限)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무한이란 상대유한(相對有限)과 대비되는 말로써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세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괴롭다고 하는 것은 전부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나야만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상대유한을 벗어나 참된 행복의 길로 들어가는 길, 이것은 바로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는 염불, 즉 나무아미타불을 부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는 염불인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을 두고 ‘나불거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자꾸 나불거려야 합니다.

쓸데없는 말로 나불거리면 병이 들지만, 내가 바로 부처임을 확인하는 염불로 나불거리면 있던 병도 없어집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불거리는 것이 최고입니다.

 

“나도 부처님, 너도 부처님, 우리 모두 부처님”

 

세상에 염불만큼 쉬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노는 입에 염불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입에서 염불하지 않고 그냥 놀리면 구업(口業)을 짓게 됩니다. 입이 놀면 자꾸만 딴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번뇌망상이 많을수록 건강은 나빠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입이 두개가 아니기 때문에 염불하면 구업을 지을 입이 따로 없게 됩니다. 그냥 놀리면 구업을 지을 것을 염불하므로써 업장이 소멸되고 정토를 장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불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자꾸만 나불거려야 합니다. 돈 안들이고 건강하게 사는 길은 이것뿐임을 명심합시다.

무량광 무량수 나무아미타불.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