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내가 열심히 살면 그만이지 더 이상 무엇을 바래?”하는 소위 자력(自力)의 사고방식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도리어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나는 삶에 감사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의 수행을 폄하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량수경을 펼치라. 그리고 눈이 있다면 보고, 귀가 있다면 듣자. “과거와 현재(現在)와 미래의 부처님은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서로 염불하신다”는 소식과 마주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르자면,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과 따로 떨어진 자기는 없다. 해서 같은 커피라도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서 맛이 다르다고 느낀다. 분위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따라서 2인칭이나 3인칭이라고 하는 너 또는 그나 그녀는, 그것을 판단하는 1인칭으로서의 나 없이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조상 때문에 또는 사회 때문에 라는 말을 하지만, 그것을 동일시하는 나라는 1인칭(人稱)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삶의 진실은 나를 떠난 타력(他力)에서 구할 수도 없다.
실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2인칭이나 3인칭 때문에 얼마나 속상해 하는가? 내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지, 자식이나 부모로부터 친척들에 이르기까지 당최 마음에 차질 않는다. 직장 동료들은 속 썩이고, 정치판이나 경제계의 흐름들은 마냥 내 뜻을 거스른다.
삶의 진실은 타력에서 구할 수 없어
그런데 문제는 2인칭 3인칭을 하루 종일 나열하여도 끝날 줄 모르는데, 1인칭에 대한 점검은 좀체 찾아보기가 어렵다. 2인칭이나 3인칭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다 캐면서, 막상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다. 어떤 2인칭이나 3인칭이든 1인칭에 매달린 상태다. 때문에 나로부터 즉 1인칭을 점검하지 않고는 2인칭이나 3인칭의 인생에 의해서 끝없이 쫓기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맞불의 원리와 같다. 들판을 뒤덮으며 넘실대는 불길이 마을을 덮칠 것 같으면,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미리 불을 질러버린다. 불이 닥치면, 그것을 물로 끄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을 지르다니!
그럼 어떻게 되는가? 맞불이라는 게 참 묘하다. 불이 태울 재료가 있을 때만 타오른다. 그런데 불은 불을 태우지 못한다. 불이 불을 만나면, 불로서의 고유성이 사라지고 만다. 왜 그러한가? 1인칭밖에 없으니까 그렇다. 불은 태워야 될 너라는 2인칭이 따로 없기에 그냥 없어진다.
물도 다르지 않다. 목욕탕에 물이 쏟아질 때, 물에 젖는다고 하지 않는다. 물은 물을 적시지 않는다. 그냥 물이 된다. 너무나 단순하다. 적시거나 젖거나 할 물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불은 불이고, 물은 물이다.
물론 태워야 될 너, 대립하고 있는 너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싸우고 나면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역설을 쫓기도 한다. 싸움 상대인 너라는 존재가 또렷할수록 오히려 나라는 존재가 확연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와 나라는 대립구도를 갖는 한,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영원한 투쟁(鬪爭), 이른바 “만인(萬人)의 만인을 향한 투쟁”을 되풀이하기에 그렇다.
지옥-천당도 본래부터 있지 않아
나는 2인칭이나 3인칭을 인식함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니 세상 그 자체가 오직 나라는 1인칭으로 존재한다. 바꿔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악당도 성인도, 지옥도 천당(天堂)도 본래부터 있지 않다. 1인칭인 나를 떠나지 않으므로, 다만 있다면 1인칭인 나로 비롯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불퇴전(不退轉)의 염불행자가 사는 시간과 공간은 다만 극락(極樂)일지니, 새삼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겠는가? 나무아미타불!
여여 법사 (문사수법회 대표법사)
법보신문 906호 [2007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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