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친구와 동업을 하였는데 그 친구의 배신으로 인하여 불행은 시작되었고 하루하루가 힘든 삶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불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과법을 믿게 되면서 친구와 나와의 관계가 전생인과의 소산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리고 편안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그 친구와의 인과가 남아 있어서 또 이어지

문사수 2009.12.21 조회 수 5799 추천 수 0
먼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우님께서 지난날 힘들었던 삶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을 분명히 믿고 보살의 삶을 살아가고자 원력을 세웠다면 결코 악연은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파생되어진 어떤 일이든지 마음에 담아두고 미련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원인이 되어 윤회하게 될 것입니다.

중생은 어느 누구도 고해(苦海) 속을 방황하며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준 이가 없지만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살게 되고, 또 지금의 현실이 고통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하여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그 같은 삶을 벗어나기 보다는 오히려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더 큰 고난의 삶으로 윤회하여 회한의 눈물을 한없이 흘리기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없는 과거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중생이 악도(惡道)를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고 흘린 눈물의 양(量)이 저 대해(大海:태평양 바닷물)와 같다.’고 말씀주고 계십니다.

지금 이와 같이 고통 받고 사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든데, 몇날 며칠을 생각하고 여러 달을 고뇌하면서 내린 결론은 고통의 삶을 떠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원인은 그대로 놓아두고 현재의 삶에서 조건만 한두 가지 바꿔서 변화를 모색하려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머지않아 고스란히 장애로 다가오게 되고 뒤늦게 후회하지만 너무 늦은 후회일 뿐 현실은 더 큰 고통을 낳게 됩니다.

범부 중생들은 ‘업보윤회(業報輪廻)’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서는 자기가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 있습니다[자업자득(自業自得)].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임을 불자가 아니라도 널리 알려져서 이제는 상식이 되어있습니다. 이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지해서 생각해보면 나에게 나타나는 모든 일은 내가 전생에 지은 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적어도 삶이 진솔해지며 헛된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과욕으로 살아가지는 않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 왜 미혹한 중생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인과응보를 설하시고 계신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과응보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조건 인과를 믿게 되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현실의 삶이 전생에 지은 업의 결과만 받고 지내는 소극적․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과에 걸려 있으면 또 다른 의미의 고뇌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의 삶들이 전생의 업을 받아야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라면 지금 새삼스럽게 인생의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으며 어떤 노력도 부질없는 가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기억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야 하니까 무섭기만 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 같은 인생은 마치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데 언제 어떤 괴물이 나타나서 나를 습격해 올지 모르는 겁나는 마음으로 어두운 길을 걷듯이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미혹(迷惑)이며 무지(無知)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생의 생명관을 지니고 살아가는 자에게 있어서는 인과응보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부처님께서 주신 금구성언(金口聖言)의 거룩하신 가르침을 만나게 됩니다. 『금강경』에 법문 주시길 “여래가 말한 일체 모든 상(相)은 곧 이것이 상이 아니며, 또 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중생이 인과를 받고 윤회하는 삶은 곧 진실한 삶의 모습이라 말할 수 없느니라. 중생생명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여래는 모든 중생도 진실에 있어서는 중생이 아니라 곧 부처생명이라고 하느니라.’고 하심과 같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참생명이 부처생명임을 분명히 믿게 되는 순간 그는 발심(發心)을 한 자이고 발심한 이는 인과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어두운 밤길을 두렵고 힘든 마음으로 가야만 하는 나그네와 같은 삶이었지만 만약에 이 가르침에 의지해서 살아가면 끝없는 희망과 기쁨 속에서 영광스럽고 성스럽게 사는 삶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곧 ‘보살도(菩薩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보살도에는 여섯 가지의 바리밀행[六波羅蜜行]이 있습니다. 이 바라밀행은 곧 나의 영원한 미래를 창조하는 길이며, 이 세상을 그대로 불국토(佛國土)로 건설하는 신비한 도법(道法)인 것입니다. 이 바라밀행으로 살아갈 때, 인생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인 괴로움을 어쩔 수 없이 받아가며 사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형벌(刑罰)의 장’이 아니라, 불국토 건설의 거룩한 도량(道場)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전생에 지은 바의 여러 가지의 업의 결과가 나에게 ‘해로운 존재’ 또는 ‘인생의 적(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보살도를 행하게 하는 ‘고마운 재료(材料)’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과거생의 업보를 두려워하거나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살행으로 소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일도 사실은 우리에게 ‘무상(無常)’을 느끼게 하여 불도에 들게 하는 고마운 스승이고, 참는 공부와 애착을 끊는 공부를 하는 귀중한 기회이며, 중생의 삶을 청산하고 보살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참으로 고마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불행할래야 불행할 수 없는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지닌 ‘불자(佛子)’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겐 그러한 위대한 성품이 있다고 부처님께서 간곡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할 수밖에 없는 보살들입니다. 앞으로는 ‘업보’에 대한 생각을 바꿔서 보살행을 행하는 기쁨에 찬 밝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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