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정진 중에 잡생각이 너무 많아 잡생각을 하는 건지 정진을 하는 건지 구별이 안됩니다.

문사수 2010.02.03 조회 수 7954 추천 수 0
어느 덕망이 높은 큰스님의 지도하에 열심히 수행하던 제자가 자신의 수행에 진전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수행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니 도저히 더 수행을 해나갈 수가 없어서, 어느날 스승에게 고백하였습니다.
“스승님, 저는 아무래도 근기가 낮아서 수행할 그릇이 아니 될 모양입니다.”
“왜 그러는냐?”
“정진하면 할수록 번뇌망상이 더욱 들끓기만 할뿐 도저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스승이 제자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너도 그러냐? 나도 그런대!” 하며 반가워 하시더랍니다.


오래된 방을 사용하려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깨끗이 한 후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청소를 하면 먼지가 일기 마련입니다. 먼지가 무서워서 청소를 그만두면 결코 그 방을 쓸 수가 없겠죠. 이와 같이 정진수행 중에도 먼지처럼 잡생각이 일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첫째는 잡생각이 일지 않아야지 수행정진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정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서두에 든 일화처럼, 오랜 수행을 하신 대덕께서도 번뇌망상이 치성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정진이 이어진 당연한 결과로서 지혜가 깊어지고 덕망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치성하는 번뇌망상을 애써서 없애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번뇌는 우리의 의식(意識)에 반연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통상 번뇌의 종류를 108번뇌라고 지칭합니다. 그래서 번뇌를 없애려고 생각하는 순간 108번뇌가 소멸되기는 커녕 한가지 번뇌를 더 추가시키는 꼴이 되고 맙니다.


콩나물 시루의 비유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콩나물을 키우려고 시루에 물을 붓지만 바닥이 뚫린 시루아래로 물은 다 빠져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나물은 물을 머금고 쑥쑥 자라납니다. 우리의 정진도 당시에는 잡생각에 휘둘리고 눈앞의 성과도 보이지않고 하릴없이 행하는 듯 보여도 마침내는 우리의 업장이 소멸됨과 동시에 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소오나라는 비구는 참으로 열심히 쉬지않고 정진하였지만 어느날 퇴타심(頹惰心)이 들었습니다.
“나는 부처님제자로 성문(聲聞)의 경지에 올랐는데도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여 복이나 짓는 편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께서는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소오나여,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땠느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또 어땠느냐?”
“역시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너의 정진도 그와 같다. 너무 조급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슨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放逸)하지도 말아라.”
그 후로 소오나는 거문고 비유를 되새기며 정진을 계속할 수 있었고 마침내 아라한과를 이루었습니다.


정진(精進)은 끊임이 없어야합니다. 특별한 때만 아니라 앉거나 서거나 걷거나 섰거나, 손님대접하고 마땅 쓸 때도 간단(間斷)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언제 어디서든 정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문고를 자꾸 켜야지만 줄이 느슨한지 팽팽한지를 알아서 알맞게 조율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으른지 조급한지 조차도 정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자기 진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우님께서 잡생각이 많이 든다고 스스로를 돌이켜 본 것도 정진하기에 가능한 반추일 것입니다. 오히려 찬탄드립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을 놓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번뇌망상에 끄달리지 않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부지런히 정진할 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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