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주간불교] 業을 대신할자 어디에도 없다

문사수 2014.09.01 조회 수 3126 추천 수 0

“낮에는 이리로 밤에는 돼지로”

業을 대신할자 어디에도 없다

唯佛與佛 ‘부처와 부처끼리’ 如如 김태영(문사수법회 대표법사)




결정된 운명이 있는게 아니라
벌어진일 감내하며 사는 것이다
선천적 조건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이 전부아니라는 업보관 중요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력에 대하여, 업(業)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업에 충실하라!’고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중앙전법원 개원20주년 기념법회에서 법문하는 여여 법사님.


그런데 안타깝게도 ‘네 업이 잘못 되었다’거나, ‘내 업은 뒤틀려 있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변명거리인 양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래서 업을 바꾸어 보겠다고 푸닥거리를 하거나 부적을 태우기까지 합니다. 본인으로 살고 싶어서 하는 행위지만, 그렇게 규정된 입장을 고집하는 업은 막상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업이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발휘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이 흘러갈 때 깊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고 있으면 시냇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계곡을 따라 흐르던 물이 점차 모아지고 폭이 넓어지면 강물이라고 이릅니다. 그리고 강물로 흐르다가 한참을 내려가서 육지가 끝나는 곳에 이르고 나면, 서해라든가 남해라고 하면서 바닷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라고 하는 업은 그대로이되, 그 때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미지가 다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냇물과 강물 그리고 바닷물의 실체를 따로 인정하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우습지도 않은 시도일 것입니다.


물에 담겨있는 생명력은 무한히 흘러가는 것을 업으로 합니다.

 

따라서 업은 주물로 찍어내는 그릇과 같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살아온 결과에 따르는 보만은 각자마다 다른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자작자수라든가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어쩌지 못할 결정된 운명이 별도로 있다는 게 아니라, 삶의 당사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의하여 살아가게 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감내하고 사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남자나 여자로 사는 것을 어찌할 것이며, 부모와 자식 간으로 만난 인연을 어쩌란 말인가?


그런 선천적인 조건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 업보관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받을 건 받지만 그것만으로 삶이 그치는 게 아니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안심 법문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면 일상용어에서는 업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를 묻습니다. 심지어는 남녀 간에 맞선을 볼 때도 상대의 직업을 따지는 것은 필수사항에 속합니다.


헌데 마땅히 확실한 선을 긋기 어려운 직업이 하나 둘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우물쭈물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업의 종류는 10만여 가지라고 했는데, 종류가 하도 많아서 그런지 통계조차 어려운 실정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을 갖고서 업을 발휘하는 것이 직업이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또 ‘어제 무슨 작업을 하셨습니까?’라고 말할 때의, 작업을 들 수 있습니다. 보통은 별 생각 없이 간단히 육체적인 노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그런 정도로나 취급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지을 작, 즉 ‘업을 짓는다’는 말이 작업의 본뜻입니다. 삽질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보기에 노무자로 보이든 말든, 시멘트를 비비고 있을 때 고된 작업으로 보이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진실은 그런 상대적인 평가에 의해 좌우될 만큼 못난 게 아닙니다. 자신의 업을 짓고 사는데 이리저리 눈치보고 있을 새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본질적인 바탕도 얼마만큼 자기화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뭇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작업하느냐에 의해서 삶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채워집니다. 일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 몇 푼으로 환산하기에 급급한 사람도 있습니다. 얼핏 겉보기엔 비슷한 듯하지만, 각자마다 발휘한 업의 질(質)에 있어선 전혀 다릅니다.

업은 스스로 짓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걸레질을 어쩔 수 없이 한다거나 죽지 못해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력으로서의 업은 본래부터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는 적절한 표현이 바로 실업입니다. 단순히 다니던 직장을 잃고 있는 상태를 실업이라 하는 게 아닙니다. 업의 논리 입장에서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업을 잃어버렸을 때가 실업이라는 본뜻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업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럴듯한 직장에서 월급도 많이 받고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예외가 될 듯도 하지만 그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삶의 당사자인 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짐짓 하루하루를 태연스레 보내는 듯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자신의 실업 상태를 감지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아예 현실에 안주한 채 바쁜 일정에 함몰되어 있을 뿐입니다.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큰 차를 굴리며, 그럴듯한 직장만 갖고 있으면 생명이 보장되리라는 기대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안정은 자신의 업을 한정시키고 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산다는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는 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사회는 자기 업을 잃고 사는 실업자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스스로 돌보지 않는 사람의 업을 대신해 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점은 엄연합니다. 어떤 사회비평가는 요즘의 현대인이 사는 모습을 가리켜, “낮에는 이리로 살고 밤에는 돼지로 산다”고 풍자합니다. 무척 듣기 거북하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로지 닫혀 있는 자신의 이익만 보이기에, 낮에는 눈을 밝히고 서로 이리와 같이 뜯어먹고 삽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배를 두드리다가는 잠자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뭘 그리 부풀려서 얘기할 거까지 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아야지 보람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회라면 이는 분명히 건강한 사회는 아닙니다.

 

한 번 따져봅시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왜 출세하는지도 모릅니다. 왜 결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 애를 낳는지도 모릅니다.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다만 바쁘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 정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업을 드러내며 사는 모습을 표현한 일시적인 상태이지, 그 자체가 업은 아닙니다. 운전하는 이유는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함이지, 내가 남보다 잘한다거나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식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좌담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업의 주인공인 본인(本人) 이외의 어느 누구도 대신할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이는 물론이요 남녀의 차이나 경제적인 처지도 상관치 않습니다.


자녀의 성적을 올리려고 부모들이 시험을 대신 치른다고 해서, 그 아이의 실력이 향상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자녀가 귀여워도 자식 대신 밥 한 숟갈 대신 못 먹어 주는 게 인생의 본업입니다.


결국 본인 스스로 갖고 있는 업을 무한히 내어 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사 바로가기  http://www.jubul.co.kr/news/27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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