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현실이 따라주질 않으니, 짜증의 연속입니다. 어디 좋은 해법은 없을까요?

문사수 2009.09.28 조회 수 5188 추천 수 0
당연히 있습니다. 염불이 그 답입니다.
맞닥뜨리는 현실의 괴로움이란 자신의 참생명을 직시하지 않는데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요행수나 비방을 좇아 헤맨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마치 글 읽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문맹자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글을 배우는 이유는 글을 깨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글을 깨쳤어도 전혀 글을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애당초 글을 모르는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삶과 현실이 주객으로서의 실체가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관계하면서 주객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관계성을 일러 연기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나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세계가 있는가하면 세계로 투영되는 내가 존재하는 것도 확연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객관적인 실체로만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네 삶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은 고정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반면에 나의 삶은 때와 곳을 따라서 모습을 달리합니다. 세상의 모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하지 않는다는 법칙이야말로 항상 하다는 역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의 정체입니다.

이와 같이 현실은 소유하려고 한다고 해서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소유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 현실을 완성시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는 곧 현실은 소유가 아니라, 삶의 존재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현실을 완성시켜야 삶은 비로소 완전해 집니다. 지금 만약 온갖 어려움과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것이 많다는 뜻이 됩니다. 맞닥뜨리는 문제들 속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삶의 가치가 무한할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염불법은 약속합니다. 영원한 흐름으로서의 나의 인생을 가둘 수 있는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아미타불!”할 때, “나의 참생명은 부처님생명입니다!”를 선언합니다. 그렇기에 원나라의 조휘(祖輝)라는 분은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이르기를, “무한생명인 부처님이시니, 그 가치를 다 말할 수 없구나!”하는 뜻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 설부득(說不得)!”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한히 솟아나는 참생명의 무한한 가치를 머리로 이해했다는 것과 실현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잘 쓸 수 있는가는 각자 자신의 몫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주변에 나타나는 사물이나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싫던 좋던 내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거니와,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염불행자가 지향하는 삶은 괴로움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괴로운 현실은 본래의 삶이 아닙니다. 염불을 통해서 이미 주어져 있는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아 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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