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보면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라고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 아닌가요?

문사수 2009.09.28 조회 수 5265 추천 수 0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말이 갖는 인식의 한계에서 말미암는 숱한 오해 중 하나가 돌출된 결과일 뿐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면 욕심을 버리는 것은 발원의 시작이며, 발원을 하는 것은 욕심의 궁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욕심과 발원은 삶을 가꿔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필수요소인 셈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무엇인가를 끝없이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바라는 것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사뭇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식사시간에 “어떤 음식을 먹을까?”하고 고민하는가 하면, 진수성찬에도 전혀 입맛이 당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의 바람을 획일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바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하는 구별은 있겠지만, 바람의 속성은 또 다른 바람을 확대재생산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식욕이나 성욕만이 아닙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바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현합니다. 보다 강하고, 보다 높고, 보다 넓은 성취를 기다리며 말입니다.
그렇지만 바람의 정도가 더해질수록, 좌절의 아픔도 커지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와 같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끝없는 바람의 노예가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고 불만족스런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끝없는 욕심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이에 근거합니다. 모든 괴로움은 욕심으로부터 비롯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삶을 속박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만물은 서로 연관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연기법을 기본으로, 욕심을 조절하라는 적극적인 삶을 권장하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단순히 욕심을 바라고만 산다면, 언제까지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족한다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바람이든 다른 사람이나 대자연의 힘을 빌려야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살려주고 있는 무한한 힘을 받아서, 만나는 모든 인연마다를 살리는 힘으로 되쓰겠다는 자세를 표명하는 것이 바로 발원입니다.
따라서 발원의 당사자가 할 일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원력이 성취되도록 부처님께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기회를 드린다고 하니까 어쩐지 이상합니까? 부처님의 원은 이미 성취가 되었음을 다른 자리를 빌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 기회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원을 성취하시도록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원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온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 염불로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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