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맞닥뜨리고 있는 어려움은 뚜렷한데, “나무아미타불!”이나 하고 있는 게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니 염불하고 있다가, 공연히 짜증이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나요?

문사수 2009.09.28 조회 수 5293 추천 수 0
세상적인 기준을 앞세우려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부처님과의 만남을 기꺼워하지 않습니다. 꿈꾸고 있는 사람이, 그 꿈에서 깨어나기를 싫어한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염불로 살아가는 사람은 남들에게 아부하는 말을 할 새가 없습니다. 자신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이듯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사람이나 모든 사건도 그렇게 대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칭찬보다 오히려 갖은 구박을 받기도 합니다. 한창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을 깨울 때,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알고 있다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법칙에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가 따로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가서 돕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제어하지 못할 때는, 강제로라도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쁜 버릇을 고치고 사람답게 살아갈 터인데, 이를 고깝게 여깁니다. “내가 사는데 당신들이 보태준 게 뭐 있어. 내 식으로 살거야”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한정된 껍질로 뒤집어씌우고는, 그런 자신의 모순이 깨지기를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을 중생살이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 분명히 아닙니다. 눈 밝은 사람이 보기에 너무나 딱한 정황입니다. 참생명의 무한한 삶을 써보지도 못하고 썩히는 게 안타깝습니다. 만약 모른다면 그만이로되, 알면서 방관한다면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중생살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기꺼이 “청(請)하지 않은 벗이 되어서 청하지 않은 가르침[不請之友 不請之法]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시기에, 자발적으로 청하거나 청하지 않거나에 관계치 않으십니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잘못된 삶의 껍질을 깨고자 합니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진정한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 지금 애가 입 속에 쇳조각이나 유리조각을 넣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합당한 지 생각해보십시다.

“어이구 예쁘구나. 네가 실컷 씹다가 알아서 뱉을 때까지 기다리마”해야 옳은 지, 아니면 우는 애를 때려서라도 입을 벌려 피가 나더라도 유리조각을 빨리 빼주어야 하는 지를 판단해보십시오. 당연히 앞뒤 가릴 틈이 없습니다. 피를 내서라도 조각들을 제거해주어야 합니다. 속 모르는 다른 사람이나 당사자인 애가 심하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는 동안 큰 일이 닥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염불행자는, 스스로가 청하지 않은 현실에 담긴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짜증이 날 때야말로 오히려 더욱 염불을 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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