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나의 구원, 문사수

정희석 2009.09.15 조회 수 3583 추천 수 0


멸(滅)함이 없고 생(生)함이 없으며, 단절도 아니고 상주(常住)도 아니며, 일(一)도 아니고 다(多)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하여 길상한, 연기(緣起)를 설하신 정각(正覺)의 불타에게, 설법자 중에서 최승의 분으로서 나는 정례합니다.

-나가르쥬나-                                                                    

 

그곳이 바로 무간지옥이었습니다.

한치의 여유도 없이, 한 발자국도 옮겨 디딜 공간도 없는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앉아있어도 서있어도 창 밖을 내다보아도 방안에 드러누워도 내가 쉴 수 있는 공간은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갑자기 나가서 차를 닦기도 하고 무작정 시장을 한바퀴 돌아보기도 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좌절이었습니다. 우울증의 정의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병’이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너무나 명료한 정의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볼 때마다 안일하고 나태하게 보냈던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그리고 그 잘못된 시간을 절대로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감이 무거운 무게로 가슴을 짓눌러 왔습니다.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검댕이로 형상화되어 꿈속에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수면제에 의지하여 보내던 한심한 시절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4개월간 힘들었던 파업이었으나 조합원 모두가 함께 한 고생이었습니다. 그리 좋지 못했던 결과, 그 어려움의 중심에 있어야 했던 위원장이었기에 당연히 더욱 힘들어야 했던 것일까요?
결코 저만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지는 않았는데…… 능력은 부족했지만 사심없이 조합원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며 잘하려고 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다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 마음은 책임을 추궁할 대상을 찾으며 보이지 않는 분노의 불길에 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인줄 알았는데 눈에 안보이는 세상이 분명히 있고,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이것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어. 사람들은 흔히 젊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으면 제명에 못죽었다고 하는데, 그건 전생에 지은 업의 과보에 의해서 그게 그 사람의 명(命)일 수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는 저녁을 같이 먹으며 자기는 최근 몇 개월간 가치관의 큰 변화를 경험했으며, 그 귀결은 불교였다고 저에게 약간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인용은 그의 이야기 중 일부이며 나이 40이 다 되어서야 불교를 만나게 된 것이 원통하다는 심정까지 덧붙였습니다.

희미한 불빛이 비쳐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인과응보(因果應報)!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인과응보의 법칙을 어찌 의심할 수 있겠으며, 또 그것이 이 우주의 법칙이라면 한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렇다면 이 고통의 원인 제공자는 누구인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모두가 자업자득, 이 고통의 원인은 바로 나요, 그러니 해결할 자도 나밖에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자, 누구를 원망하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났는지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 없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어려움이 없으면 반드시 교만과 사치가 생기고

      
교만과 사치가 일어나면 반드시 일체를 속이고 억압한다.

       이에 근심과 재난으로 해탈을 삼으리라.”

두 번째로 등장한 불빛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피해야 할 어떤 것, 절망해야할 어떤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선지식이요, 고마워해야할 복전(福田)일 수 있구나.
이제는 가슴에 환한 빛이 비춰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여름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에서의 수련회는 한마디로 먹물이 든 마음을 빠는 경험이었습니다. 
새벽예불, 발우공양, 저녁예불 전(前)의 법고 소리……. 법고소리는 길짐승을 위한 소리라는 설명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지던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우주관, 참선, 우렁차던 계곡 물소리, 장경각 뒤꼍의 벌레소리……

540배의 절을 하면서 느끼는 육신의 고통이 차라리 편안함이던 경험, 이어서 불교가 절에만 있고, 일상 생활에서는 현실 때문에 유보되는 일은 한참 잘못된 것이라는 깨달음,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값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불교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 가정의 중심에 불교가 있다면 화목한 가정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라는 생각, 궁극적으로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불교가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해법이라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는 결론.

즉 불교가 곧 삶 자체라는 생각……

여여 법사님과의 만남은 거의 11년 만에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법사님께 지금까지의 이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했습니다.
항상 웃으시며 유머에 넘치시는 모습은 11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제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정진을 좀 해봐, 확 달라지기도 하는데……”
법사님께서는 21일 정진을 권유하셨고 저는 법요집을 받아들고, ‘난감 반 기대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21일간의 새벽 정진.


다음은 최근에 야외에서, 색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 뇌리를 스쳐간 상념입니다.
비록 일시적으로 스친 상념에 불과할지라도 저는 이를 소중히 하렵니다.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사실상 존재하는 ‘것’은 없다.
고통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영겁의 세월 이전부터 앞으로 또 영겁의 세월까지 어느 중생에게도 단 한 방울의 고통도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통을 받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다(不可得).
마치 깊은 바다 속에서 먼지가 날릴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하여 삶이란 엄청난 기쁨이 무한히 저장된 보물창고인 것이다.
아무리 꺼내 써도 다함이 없고, 하루하루가 항상 새로운 기쁨으로 빛나는 그런 축복의 삶인 것이다.’

법사님 말씀대로 참 많이도 달라졌습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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