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달라지는 내 모습

오두석 2009.09.16 조회 수 3818 추천 수 0
 

안녕하세요?

  이렇게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98년 10월 25일 한탑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보광(寶光)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생명이라는 보배를 가지고 세상에 빛이 되어 살라고 지어주신 것으로 믿고 제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저는 이제까지 특별한 종교는 없었고 그저 남들이 물으면 ‘불교’라고 했던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등을 달거나 치성을 드리거나 할 때 절에 다닌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장인 장모님은 진실한 카톨릭 신자라서 저희가 결혼할 때는 성당에서 혼배성사의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아내가 종교 문제로 다툰 적은 없습니다.

  다만 장모님께서 미국에 있는 첫째 사위는 딸보다도 더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있다며 저와 처에게 본받으라고 독촉하기는 합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제 아내는 종교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저희 집에 오시면 먼저 제 법요집이나 법회보 등을 눈에 잘 안띄는 곳으로 치워둡니다.


  이제부터 제가 문사수와 인연을 맺으면서 달라진 생활모습을 돌이켜 보겠습니다.

  첫째, 저는 제가 짜맞춘 틀 속에 갇혀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했고 제 기준에 맞춰서 살려고 해왔습니다. 아내에 대해서나 아이들에게조차도 항상 선을 긋고 제 나름대로의 잣대로 평가해왔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를 들면 집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흥에 겨워합니다. 그러면 저는 여자가, 더구나 아이들의 엄마가 얌전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경박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며 싫은 내색을 했습니다. 또한 아이들과 함께 외출했을 때 거리에서 껌이나 음료수 등을 사달라고 하면 제 처는 얼른 사주고, 저는 그런 모습이 싫어서 아이들과 아내에게 벌컥 화를 냈습니다. 
 이렇게 제 기준에 맞추려고 하다보니 아내와 자주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얼마 안가서 아내가 화해를 해오고 저는 못이기는 체하며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권위적으로 말했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많은 면에서 제가 아이들이나 아내에 대해서 이러한 일들을 인정하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내에 대해서는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오면서, 속좁은 남편으로 인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응어리진 것이 있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생활로 돌아와 활기찬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흥겹게 어울리는 모습을 굳이 말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행동 또한 이제는 많이 이해해줍니다. 그러니 요즘은 아이들도 아빠를 무척 더 따르고 좋아합니다. 가끔 제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할 때면 ‘아빠 성질 많이 죽었다’하며 아내나 아이들이 슬쩍 웃어넘깁니다. 예전 같으면 옳으니, 그르니, 무엇이 잘못되었느니 하면서 다투었을 텐데…

  이처럼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데 무엇을 나무랄게 있겠습니까? 이렇듯 저의 바뀐 모습으로 인해 집사람도 바뀌어 갔고 집안에 큰 소리도 사라졌습니다.


  둘째, 직장생활하면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종금사에서 근무하다 IIMF로 인해 회사가 퇴출되어 지금은 정리 금융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직장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을 흉보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의 원인이 내가 무엇인가를 구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란 것을 알고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인연대로 생활에 임하려고 합니다.

  최근에 달마조사의 무소구행(無所求行)에 나오는 ‘구하는 바가 있으면 모든 것이 고통이고, 구하는 것이 없으면 곧 극락이다[有求皆苦 無求乃樂]’라는 뜻에서 고통의 시작이 구함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직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 않지만 그래도 많이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불교를 접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몇 가지 예를 들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제가 처음 문사수를 만난 것이 98년 9월 중순경이었습니다. 활동적이지 못한 성격 때문에 어디든 나서는 것을 어색해 하여 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쉽게 결정되진 않았지만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자고 생각하며 시작한 것이었지요.

  그러던 것이 두가지 면에서변화를 맞게 되었어요.

  그 하나는 ‘나의 본래 생명은 이미 부처생명이며, 절대자 또는 저쪽 편에 있는 신에게 내 삶이 의존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법문입니다. 저는 이 법문을 통해서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종교관에 큰 변화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가 처음에 막연하게 의지하던 종교, 즉 기복적인 모습의 신앙관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보산 법우가 반야심경이 불교의 핵심이라며 그 내용을 자주 제게 설명해 주었는데, 들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듣고 나면 정리가 안되곤 했어요. 그래서 반야심경 뜻을 설명해 놓은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제게 책 한 권을 선물했습니다. 바로 ‘반야심경과 생명의학’이란 오까다 가즈요시란 일본인이 쓴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반야심경의 궁금한 부분을 자주 들춰보곤 했지요. 그러다보니 공(空)이니 무(無)니 하는 단어들도 점점 친숙해지면서 그 의미까지도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하지만 아직까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인연이 되어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러면 제가 그 책에서 감명깊게 느꼈던 시 하나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뜻하는지 법우님들도 생각해 보세요.


온몸을 입처럼 허공에 걸어놓고

동풍인지 서풍인지 분별하지 않으며

한결같이 그대 위해 반야를 설하노니

땡그렁 땡그렁 땡그렁 땡그렁


  몇번이나 보았지만 처음에는 인연이 안 닿아서인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어요. 그러던 어느 날 비오는 출근길 전철에서 우연히 이 부분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처마 끝에 걸려있는 풍경을 뜻하는 것임을 안 순간, 신선한 충격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법우님도 가만히 이 내용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세요.

  처마 끝에 걸려있는 그 풍경에서 이렇게 큰 진리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에 가슴벅차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특별한 때에만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고, 온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매달린 채 한결같이 모두를 향해 반야를 설하고 있는 풍경…… 우리가 생명이라고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법이 설해지고 있음을.

  설명이 부족하지만 제가 느낀 벅찬 감동을 법우님도 함께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말씀드릴 표현력도 없지만 더 말해봐야 사족에 불과할 것입니다. 법우님이 직접 곰곰 생각하고 느껴보세요.


  이제 제가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인연(因緣)’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저는 인연이라고 하면 부부인연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들의 만남 정도를 인연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내게 펼쳐지는 모든 상황들이 모두 내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이고, 내 인연에 따라 내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닥치는 모든 고통이 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선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스스로 원인을 찾아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항상[常]’이라는 것에 대해서 같이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누군가 집사람에게 집안이 깨끗하다고 칭찬을 한 적이 있었던가 봅니다. 제 집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 출근하는 제 뒤에다 대고 “여보, 요즘 왜 이렇게 행복하지?”하며 즐거워하더군요.

  저는 전철 안에서 아내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항상하는 것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항상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법회나 법우지, 혹은 새벽 정진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때였어요.

  그래서 집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어요.


  자기 자신에 의지하며 살아도 시시때때 달라지는 마음으로 항상 하지 못해 불행해 하는데 어찌 남의 말에 의지해서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부디 자기 중심을 찾고 더욱 나아가 법에 의지하여 순간 순간이 극락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항상하는 것이 없음을 설한 법문이 법우지에 실린 것이 생각나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변하는 모든 것은 덧없어

모두가 났다가 없어지는 법

났다 없다 하는 법 없어만지면

그때가 고요하여 즐거우리라.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요즘 저희 가정은 평안합니다.

  과거에는 왜 그렇게 가족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요즈음 집사람이 저보고 부처님이 다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란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나봅니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밖에 안보이니 제 처도 부처가 아니겠습니까?

  법우님도 이번 수련회가 정진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제가 문사수와 인연을 맺게 하고 오늘 여기까지 이끌어준 보산 정희석법우에게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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