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지금! 여기에서

박 기 범 2009.09.16 조회 수 3593 추천 수 0

저의 올 2001년 새해는 화엄경 공부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1월 2일부터 시작한 「화엄경으로 배우는 불교」강좌에 동참하여 매주 화·목요일마다 고양법당에서 여여 법사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절대적 입장에서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다고 하지만, 화엄경 공부를 통해 마음을 밝히며 시작한 올해는 분명 여느 해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강좌의 벽두에서 법사님께서는

“과연 나는 누구인가? 근원적인 나는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법사님의 질문을 접하면서 불교는 ‘물음의 종교’임을, 물음이 숙성될 대로 숙성되어야 답을 구할 수 있음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갖는 의문은 아니지만 항상 내마음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번번이 놓치고 있었던 이 의문과 함께 화엄경 강좌가, 200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에 학원에서는 선생님으로 불립니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아들이요, 동생의 오빠입니다. 집 밖에서는 어떤 이의 친구도 되며, 법당에서는 법우가 됩니다. 그 밖에 실로 다양한 역할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가리켜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자로서의 육신도, 서른한살이라는 제 나이도 근원적인 ‘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디에서 찾아보아도 ‘나’라는 실체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법사님께서는 ‘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다양한 역할과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는 ‘절대적인 생명’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 우리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드라망(因陀羅網)으로 표현되는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접점들 속에서 다양한 역할과 모습을 연출하며 살아갑니다. 그저 나의 절대생명이 그때그때 시간따라 공간따라 선택할 뿐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천백억 화신(化身)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이 ‘천백억 화신의 삶’이라는 사실, 생각할수록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백억 화신이기에 어느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된 ‘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내’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생동감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충분조건이 될 것입니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나의 절대생명이 투영된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진정 가는 곳마다 주인되는 삶,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누릴 수 있겠지요.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나의 절대생명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도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간에 절대생명으로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법사님께서는 내 눈에 어떻게 보이든지 세상에 나타난 모든 생명들은 모두 절대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러 ‘화엄(華嚴)’이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이 거리낌없이 완전히 드러난 것을 ‘꽃이 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하시면서, 세상에 드러난 모든 생명들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절대가치를 지니는 부처생명의 꽃이며 이러한 부처생명의 꽃이 세상을 장엄하고 있는 것을 일러 ‘화엄’이라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이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이 세상 그대로가 바로 ‘법계(法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이 세상이 법계(法界)로 보이지 않고 고계(苦界)로 보입니다. 여전히 ‘나’라고 고집하는 것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가 있으면 삶은 고(苦)일 수 밖에 없겠지요. 그 ‘나’는 끝내 충족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세상은 참고 살아야만 하는 사바세계(娑婆世界)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처럼 아직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전에 금강경 강좌를 들으면서도 ‘법우’지에 글을 실었는데, 그 글에서도 아직 바라보고만 있는 제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부처님 가르침을 추구대상으로 삼는 것에 그치고 있으며, 바라보고 있는 나와 대상화된 진리가 대립하고 있음을 다시 느낍니다.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믿고 받아들인 만큼만 인생이 벌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 한정시켜 버린다면 인생은 궁극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 바른 믿음을 내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멈추지 않고 정진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법계로 보이지 않고, 나에게 다가오는 생명이 부처님생명으로 보이지 않는 한 정진은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고 했듯이 저의 정진도 결코 멈출 수 없음을 받아들입니다.

고계(苦界)로 보이는 이 세계가 법계(法界)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저의 정진을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이 세계 그대로가 법계이기에 겉으로 보기에 조화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그 자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라고 하십니다. ‘나’의 입장에서 보기에 조화롭지 않게 보이는 것이지, 당연히 벌어질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당연히 벌어질 일이 벌어지는 것이 연기법(緣起法)이기에 법계엔 오직 끝없는 무진연기(無盡緣起)만 있을 따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이라 해도 연기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기에 오직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없는 것이며 따로 떨어져서 홀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상즉(相卽)이란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며, 상입(相入)이란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기에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즉상입은 당연히 그리고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생명의 원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무한한 관계성 속에서 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들에게는 내가 반영되어 있으며 그들로 인하여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끝없는 무진연기 속에서 잠시도 멈춤이 없이 세상으로부터 무한히 공급받아 살려지고 있는 내가 있을 따름입니다. 연기법에 따라 무엇에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정된 ‘나’또한 있을 수 없기에 나는 무한가능성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란, 단순히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나’를 비워버림으로써 생명의 무한가능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이르는 말로 이해합니다.

법문을 들을수록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나’를 내세울수록 삶의 가능성이 닫히게 되어 필경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겠지요. 그러면서도 내가 해왔던 역할들 중 어느 하나가 ‘나’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역할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가려져 있는 근원적인 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 전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절대적 생명을 살고 있는 ‘오늘’‘여기’의 내가 있을 따름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한정지을 수 없는 절대생명의 무한가능성을 갖는 내가 있을 따름입니다. 세상 속에서 끝없이 살려지는 내가 있을 따름입니다. 항상 내 생명의 근원자리를 찾아 그곳에 서 있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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