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문사수와의 만남

이 효 영 2009.09.16 조회 수 3591 추천 수 0

나는 비종교적(非宗敎的)인, 가부장적 분위기의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그것이 유교(儒敎)라는 종교인지 문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본적인 종교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불충분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종교 생활에 뭔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대학교를 입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1982년 나는 기독교에 기반을 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일주일 한번씩 있는 채플, 기독교개론(基督敎槪論) 과목은 종교 문화의 세계에 나를 한발 더 다가가도록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나의 종교 탐험은 시작되었는데, 집 근처의 교회를 1년 정도 드나들게도 되었다. 그리고 이때 공동번역 성경을 사서 부지런히 읽어서 끝까지 읽는 쾌거를 낳기도 하였다.

 

기독교개론 시간에 짧게나마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배우는 인상적인 경험을 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불교에 대한 관심도 싹트게 되었다. 당시의 윤병상 교목(校牧)은 기독교인 임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스님과의 교유(交遊) 관계, 불교의 기본인 반야심경에 대한 소개 등을 통해 다양한 종교를 편견 없이 볼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일반 개신교도들이 신성시하는 - 나로서는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 같은 - 개역판 성경만을 고집하는 분위기에서 공동번역 성경을 선택하여 읽도록 제시해주신 분도 이 분이다.

종교에 대한 궁금증과 참여, 상호 비교는 젊은 시절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실상 기웃거리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신앙공동체로의 확실한 소속과 얽매이지 않고 살려는 마음의 가운데 머무는 것이 나의 종교생활 스타일인지도 모르겠고, 기독교권 종교 문화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지금은 법우(法友)로 새롭게 만나는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다. 우리는 둘 다 짧지 않은 성장기 동안에는 기독교 신앙을 택했었으나, 이미 흥미를 크게 잃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일요일에는 그 나름대로 분주함이 있었다.

그런데 문화유산 답사 길에 발길 머물던 절에서의 경험때문인지 조금씩 불교에 대한 관심이 자리하고, 아무튼 때로는 불교식 예법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내심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문사수법회에 열심히 다니는 처외삼촌(보산)과 처이모(법락)의 정성 때문인지 작년 시월 어느날부터 아내가 문사수법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고양시 어디엔가 있다는 말은 처이모님을 통해 수차 들었었다. 그러나 동호회(同好會)나 혹은 흔한 개척교회 비슷한 단체가 아닐까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우리가 사는 곳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핑계로 일요일마다 지속적으로 다니는 것에 대해 반대했었다.

아무튼 우리 생활은 주말에 함께 일주일 먹을 거리를 사러 나가던 것에서, 아내는 고양 법당, 나는 ‘나홀로 집에’로 바뀌었다. 그때가 좋았지… 그러나 물귀신과(科)인 아내가 12월부터는 나마저 끌어내고야 말았다. 가족이 함께 하는 종교생활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결국 나도 아내를 따라 나서게 되었다. 더욱이 음악 지도로 바쁜 아내 때문에 비교적 열심히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2월 중순 정진원에서 하룻밤도 초심자(初心者)로서는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하루 밤을 자며 저녁 예불, 다음날 새벽 예불을 드리고 올라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문사수법회의 법우가 되었다.

 

문사수법회에 나가게 된 이후, 부분적으로는 분명 휴일의 한가로움, 가족간의 오붓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무아미타불 염불, 반야심경, 금강경의 독송에 의지하면서 사는 생활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두둑한 힘이 되고 있다. 또 반야심경, 금경경 등을 아내에게 듣고, 읽고, 이해해가면서, 모르고 지냈던 내 정체성의 일부분을 조금씩 재발견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들, 좋은 분들과의 만남, 분명 소중하게 쌓여가는 인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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