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나의 염불

정 희 석 2009.09.16 조회 수 3749 추천 수 0

『苦』

 

나는 언제나 행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나 건강하고 활기에 넘쳐서 모든 일을 이루어 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뽐내며 살고 싶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혼탁해도 ‘나’만은, 적어도 ‘내 가족’만큼은 불행의 그림자 없이 언제나 행복한 공간에 있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하고, 건강해야하고, 간혹 뉴스에서 보는 불행한 일들은 절대로 우리가족에게는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은 없습니다.

물질도, 육체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월이 갈수록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간혹 ‘물질은 어느 정도 있으면 되고 이 육체로 몇 살까지 살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까’ 자문해보지만 변덕스런 나의 마음에는 명확한 기준이 없습니다. 게다가 곰곰 생각해보면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행복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듯 합니다.

이렇듯 철저하지 못한 어중간한 삶은 흐름에 떠밀려 가는 삶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내 자신을 바라봅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에 남겨진 나의 모든 노력들, 몸짓들은 결국 이 정도에 불과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학창시절에는 명문대학 입학을 지상(至上)의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물론 꿈은 있었지만 전공을 선택할 때는 사회에서 좀더 안정된 삶을 보장받고자 살짝 접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은 너무 외로울 것 같고 남들도 다 하는 것이니까 나도 하자고 선택한 결혼. 그리고 가족을 지키는 의미가 가장 컸던 직장이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삶.

마치 이솝우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높은 나무에서 열매가 하나 땅에 떨어졌는데 낮잠을 자다가 깜짝 놀란 토끼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모든 동물들이 놀라서 도망가는 이야기처럼….

저마다 살겠다고 도망가지만 정작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지를 아는 동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행히 숲 속의 왕 사자가 늠름하게 이 들은 평정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과연 나의 삶은 어떤가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간간이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 삶이 보람있는 삶일까?’

하지만 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훌륭한 선현(先賢)들의 삶은 동경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내가 따라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 듯이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다고 쉽게 합리화하면서 다시 일상에 안주하는 삶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하여 다시 떠밀려 가는 삶,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주변을 변화시키는 능동의 삶이 아니라, 내 앞에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을 마주하기보다는 피하고 싶어하는 삶.

돈, 건강, 불행한 사건 없음이라는 조건 중 어느 것 한가지만 문제가 생겨도 나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나는 어쩔줄 몰라 합니다.

이렇게 사는 한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사성제(四聖諦) 중 첫 번째 진리가 ‘고(苦)’라는 것에 감탄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集』

 

나는 오늘도 예경합니다.

오로지 부처님만을 만나는 인연이기에…

나는 오늘도 찬탄합니다.

오로지 나의 참 생명 부처님 생명이기에…

나는 오늘도 공양합니다.

오로지 주어진 몸과 목숨과 재산이기에…

나는 오늘도 참회합니다.

오로지 참생명으로만 살지는 못하였기에…

나는 오늘도 기뻐합니다.

오로지 짓는 공덕에는 너와 내가 없기에…

 

아침마다 외우는 구절입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흐르는 물살에 떠밀려 갈 수만은 없어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무릎 꿇고 부처님께 예경(禮敬)합니다. 세상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게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것보다도 축복입니다. 어떤 고통도 그 원인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일 뿐 실체는 없다는 말씀에서 문득 구원받는 제 자신을 봅니다.

아침 정진 40분. 정진하는 40분 동안 내가 하는 일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한동안 부처님을 생각[念佛] 했지만 하고 나서보니 부처님은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한 순간도 부처님을 생각으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생각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분임을 뚜렷이 느낀 시간 이였습니다. 염불은 나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이것이 바로 염불(念佛)이었습니다.

이 염불 아닌 염불!

예전에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그렇게 알쏭달쏭한 표현 이였는데……

정진을 통해서 이제는 이해하게 됩니다.

이 이해 아닌 이해!

이 자리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무너져 하나가 됩니다. ‘나’라는 망념(妄念)의 그림자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존재 아닌 존재로서의 부처님만이 온 우주에 충만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희유(稀有) 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십니다”

수보리 존자(尊者)의 찬탄이 그대로 저의 찬탄(讚嘆)이 됩니다.

 

머리는 맑고 발걸음은 가볍게 상쾌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 하루는 어제와 다른 하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염불 아닌 염불은 40분 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순간도 할 수 없는 것이 염불이라면 24시간 하는 것이 염불일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순간도 염불을 떠난 적이 없었음을 알게됩니다.

이 염불의 바다에는 모든 것들이 녹아서 하나가 됩니다.

행복, 건강, 돈, 가족, 삶, 죽음, 너, 나 이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녹아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행복합니다.

이제는 건강합니다, 이제는 돈을 쓸 수 있습니다,

이제야 말로 살 수 있고 이제야 말로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일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진정 애정 어린 눈으로 너를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고해임이 확실하지만 나는 이제 그 고해에서 헤엄치는 것을 즐기겠습니다.

 

두 번째 성제가 ‘집(集)’이고, 그 뜻은 고통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스스로 모여서 생긴 것이라는 이해에 도달하자, 부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의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해 놓으셨다는 법문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청법합니다.

오로지 설법하는 온갖 선지식만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감사합니다.

오로지 세상에는 부처님 생명만이 계시기에…

나는 오늘도 정진합니다.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의 법문은 끝이 없기에…

나는 오늘도 수순합니다.

오로지 뭇 생명들은 무한능력의 주인공이기에…

나는 오늘도 보은합니다.

오로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살려지고 있기에…

 

감사합니다, 부처님. 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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