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내가 없어야죠

강 은 자 2009.09.16 조회 수 3623 추천 수 0

처음 불교 방송국이 개국했을 때 정말 열심히 들었습니다. 매일 주파수를 고정시켜 놓고 항상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앙수기를 공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달라진 제 생활을 성의껏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채택될 거라고 굳게 믿고 통보가 올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큰 실망만 안고 불교 방송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엔 나보다 더 훌륭한 수기 내용이 뽑혔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가 그 우수작 발표를 듣고서야 사태를 짐작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주최측에서는 부처님께 매달려서 원하는 것을 이루는 기도 성취담이나 영험담 사례를 의도했었나 봅니다.

관음기도를 얼마간 하고 난 뒤에 집안 일이 술술 풀렸다거나, 허가가 나지 않아 마음대로 수리하지 못했던 집을 관음기도를 한 뒤에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더 훌륭히 증설할 수 있도록 관청의 허가가 떨어졌다고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다 부처님의 은덕이라면서요.

자신이 성취한 모든 걸 부처님의 은덕으로 돌리는 건 감사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부처님을 설정하고 있는 불교의 요즘 실정에 대해선 여간 불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불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한없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나 자신이 실체가 아니라는 법문에서 구원의 광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난관에만 부딪히는 내 생활 환경에서 스스로 구제불능인 중생이라고 단정짓고 있다가, 그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법문은 말 그대로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나라고 알고 있던 ‘나’와 내 환경은 좋고 나쁨도 아닌 그 자체였으며, 오히려 나의 참생명이 선택한 세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믿고 있기에 그전에 하지 않던 말도 다 얘기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의 실수를 깨끗하게 인정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완벽해야 할 나도 없고, 훌륭한 환경을 구해야 할 필요도 없으므로 스스로 자책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자신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그러면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참으로 넉넉한 자유의 세계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가끔이나마 누리는 저를 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내가 없다’는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눈으로 보이거나 생각하는 내가 실체는 아니므로 그 나를 고집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를 고집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질 뿐 진정한 평화의 길은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상계의 나를 설정하고 완벽한 사람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기에 진솔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적인 매력을 느껴볼 수조차 없습니다. 혹 누군가 옆에서 뼈아픈 충고라도 해준다면 곱게 듣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시키는데 온 힘을 쏟고 오히려 충고해주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당함을 주지시키려 애씁니다.

이렇게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이고 곁에 있는 사람까지 피곤하게 합니다.

 

저 또한 지나간 날을 회상해 보면 항상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를 가질 새가 없었습니다. 남들한테 뒤질 새라 불안한 마음으로 쫓기는 날들의 연속인데, 내 앞에 나타나는 현실 세계가 즐거울 리가 없었겠지요. 혹 즐거운 일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에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것이지요. 단지 저의 기분에 따라 즐거워하기도 반대로 기분 나빠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환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남들과 비교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자신만을 발견해 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안일지상주의에 빠져서, 내 앞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하지만 현실은 제가 원하는 바와는 반대의 현상만이 나타나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제 그렇게 구하던 마음을 접어놓고 보니 지금 저는 아주 즐겁습니다. 설혹 내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진대도 당황하지 않을 겁니다. 그 일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자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실체가 아니듯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일이 실체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것도 실체가 아니라는 믿음이 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없는 나를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내가 있음으로 꼬이던 일들이 나를 주장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씩 풀려갑니다.

주장해야 할 내가 없어야만 진정 평안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데, 그 없는 나를 자꾸 내세우게 하고, 그 가짜 나를 위해서 구하도록 방치하는 작금의 세태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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