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출근할 때 뭘 갖고 가나?

정 헌 주 2009.09.16 조회 수 3584 추천 수 0

평소 퇴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장해제이다. 내 몸에 장착된 무기를 해체하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지만, 그 무기의 종류는 다양하다. 휴대폰, 호출기, 지갑, 신분증, 동전, 담배, 라이타, 벨트……. 이 중에서 가장 중요 항목이 신분증과 호출기이므로 다른 것은 무장해제시 확인하지 않지만, 이 두가지는 항상 확인한다. 유사시(?)에 반드시 필요한 것만 들고 나가면 되니까. 그리고 나머지에 대해선 무기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개수로써 내가 필요한 무기들을 인지한다. 무기를 장착시 개수가 맞으면 그것은 곧 완벽한 무장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회사 총대장의 지엄하신 기초질서의 강조로 인한 철저한 지각 점검과 그것에 굴하지 않고 즐기는 나의 아침 단잠 덕분에 출근과의 전쟁은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나. 나의 룸메이트이자 법우인 박재현도 마찬가지여서 우린 조금 일찍 서두는 사람이 차에 시동을 켜놓고, 다른 한 사람을 기다리곤 한다.

 

그날 아침은 유난히도 늦었다. 박재현 법우의 재촉 속에 무기를 장착할 틈도 없어 손에 한가득 물건을 챙겨서 차에 몸을 실었다. 박재현 법우는 운전을 하고, 난 무기를 장착하는 일을 시작했다. 양말 신고, 벨트 메고, 옷의 단추를 잠그고, 호출기는 벨트에 차고, 신분증은 목에 걸고, 기타 등등 그런데… 우째 이런 일이… 몸에 무기를 장착하는 일이 끝났는데, 내 손에 아직도 너무나도 눈에 익은 자그마한 물건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들고 나온 무기 개수는 맞는데, 한가지가 바뀌어져 있었다. 휴대폰이 없었다. 그 대신 TV리모콘이 나의 손안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아~ 나의 사랑하는 텔레비전 리모콘이 나와 떨어지기 싫어서 날 따라온 것이다.

출격하는(이것은 완전히 출근이 아니라 출격이다… 법우님들도 아침 출근을 출격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시죠?) 난 잠시 망설였다. 요놈을 어떻게 해야하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물건을 추운 자동차 안에는 둘 수도 없고… 그래서 용감하게 연구실에 리모콘을 들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 리모콘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쳤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역시 아줌마는 달라! 연구아줌마(여자 연구원을 극존칭하여 부르는 말-저자주) 曰, “왠 리모콘?” 후후후… “아하! 요것이 말야 새로 나온 변신형 휴대폰인데, 집 밖에 나오면 휴대폰, 집에선 TV리모콘이야 헤헤헤” 주절주절. 그렇게 난 변명을 했다.

 

이날 난 모든 바쁜 것을 뒤로 한 채 한 대의 담배를 들고, 온갖 폼은 다 잡고, 벤치에 앉았다. 더 이상 ‘바쁘다 바빠’라는 것이 그 순간만큼은 무의미했다. 손안에 있는 리모콘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널 이곳까지 데려온 날 용서해라.

 

일상화된 삶 속에서 우린 무엇인가를 잊고 살아간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바쁘다고 표현하면서 그렇게 적응하고, 길들여져 간다. 그리고, 이러한 길들여진 삶의 틀을 박차고 나오기를 우린 너무나도 싫어한다.

법회에 나오기 전에는 계절이 바뀔 때나 한번쯤 삶을 뒤돌아 보았으나, 법회에 참석하면서는 한주에 한번쯤은 삶을 관조하는 여유를 가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법회에 참석하면서도 신앙생활 따로, 살아가는 모습 따로로 생활했었다. 일주일에 한번의 법문 담아내기는 삶에서의 안식처로 자리를 잡았다.

이때, 우리의 잘생긴 법사님께서 나에게 던져주신 말씀이 ‘결단’이었다. 주변인으로 머물지 말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러서 정해법사님의 손에 이끌려 아침 정진을 하게 되었다. 아침 단잠을 즐기는 나에게 아침 정진은 거의 전투에 가까웠다.

그런데, 정진을 하면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다른 신앙에서 얘기를 하는 기이한 현상은 아니고, 이전에 여러 사부님들로부터 들은 부처님 법이 내 머리에서 용해되듯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아둔함은 108배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깨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설정한 24시간은 서로의 편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지 결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아침에 한 시간쯤 정진하고 나면 23시간을 살아가야 하지만, 24시간에 해결할 일을 23시간으로 해결하지 못할 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수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오늘 수행하지 않으면 나에게서 소중한 것을 잃어간다고 생각한다. 서른 한해를 살고서야 내가 아직도 내일을 가져보지 않았으며, 다만 연속된 오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오늘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림은 나의 삶속에서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며, 오늘의 내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돌이켜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정진하지 않으면, 나에겐 정진이란 없다. 내일 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비록, 아침에 법당을 매일 가지는 않지만 눈을 뜨면서 나의 염불은 시작된다.

간혹, 악몽아닌 악몽에 시달릴 때가 있다. 예전 같았으면, 걱정도 하고, 잠을 설치지만 지금은 나무아미타불을 중얼거리며 단잠을 다시 청한다. 물론, 다음날 고양에 있는 누나에게 전화를 해서 구박을 한다. 누나의 정진이 부족하여 나의 잠자리가 불편했다고. 그리고, 법사님께도 불평한다. 법사님의 정진이 부족하여, 제자의 잠자리가 불편했다고….

 

의문을 가진다. 습화된 삶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내 삶의 자리에서 벗어난 자리이며, 죽은 삶은 아닐까?

리모콘을 휴대폰으로 알고 정신없이 뛰어나온 하루를 돌이켜보면서 아무리 바빠도 리모콘으로 전화할 수는 없음을 돌이키며, 습화된 생활을 반성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삶의 의미를 잊은 채로 살아가는 다람쥐(다람쥐님 죄송!)의 모습을 왜 쉽게 발견하지 못했는지, 나의 어리석음에 나무아미타불을 조용히 부른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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